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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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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혈된 눈/ 이욱연

등록 2004-06-18 00:00 수정 2020-05-03 04:23

1990년대 초 중국에서 ‘돈 벌기 대회’가 열리기 시작했다. 톈안먼 사태에도 불구하고 중국 정부가 개혁개방 정책을 계속하겠다고 약속하자 중국인들은 너나없이 돈을 벌려고 혈안이 되어 있었다. 당시 택시기사는 최고의 인기 직종이었는데, 베이징의 택시였던 노란 소형 승합차를 타면 눈이 빨갛게 충혈된 운전자들을 흔하게 만날 수 있었다. 하루나 이틀 잠을 자지 않으면서 계속 일을 하는 것이 다반사였기 때문이다.

중국 택시기사와 한국 공돌이 · 공순이

노력하면 돈을 벌고 신분을 고칠 수 있다는 생각으로 중국인들은 신열에 들떠 있었다. 그 충혈된 눈은 사회주의에서 자본주의로 전환하는 가운데 돈에 중독되면서 망가져가는 중국인의 삶과 영혼의 우울한 상징일 수 있다. 하지만 그 택시운전사들과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생활이 힘들기는 하지만 사회주의 평균주의 시절에 느껴보지 못한 삶의 활력으로 가득 차 있었다. 한 걸음 한 걸음 고단하지만 끈질기게 기어오르다 보면, 언젠가는 기어이 정상에 오를 수 있다는 기대와 희망에 차 있었다. 지금 중국 경제가 놀랄 만큼 빠른 성장을 이룬 것은 바로 그 충혈된 눈들의 덕택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런데 그런 중국인들의 충혈된 눈은 우리들에게도 낯익다. 예전에 한국 자본주의 동력이 바로 그 충혈된 눈이었기 때문이다. 집안을 일으켜 세우기 위해 사막의 모랫바람과 싸웠고, 동생들만은 기어이 학교에 보내야 한다면서 동생들 학비를 위해 밤새워 잔업을 하다 미싱에 손을 박기도 했다. 부지런히 일하고 돈을 모아서 출세하겠다는 의지와 열심히 하면 결국은 기어오를 수 있다는 미래에 대한 희망. 그것이 단지 효과적인 착취를 위한 마약이었고, 새마을 사업용 기만이었다고 하더라도 밑바닥의 공돌이, 공순이에서부터 중산층까지 가히 범국민적인 정서이자 한국 자본주의의 문화였다.

하지만 이제 우리들 주위에서는 베이징 택시운전사들과 한국 공돌이, 공순이의 충혈된 눈을 갈수록 찾아보기 어렵다. 원시 자본 축적기에 하층민의 출세의 꿈을 담보로 하여 벌어진 가공할 살인적 착취, 그리고 그것에 기반을 둔 고도성장에 대한 열망 때문에 그 충혈된 눈에 대한 향수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그 충혈된 눈에 담겨 있던 기어오르기의 꿈과 희망, 밑바닥 인생들이 가졌던 유일한 삶의 버팀목에 대한 것이다.

사실, 예전에는 한국 사람들의 출발선이 대부분 비슷했다. 일부를 제외하고는 다들 물려받은 것 없이 출발했고, 어금니 물고 열심히 일하거나 공부하면 위로 기어오를 수 있었다. 지금 기성세대 중 대부분은 그런 바닥에서부터 기어올라갔다. 실제로 성공한 사람은 적었지만, 많은 사람들은 기어오를 수 있는 사람이 바로 자신이라고 생각했다. 온갖 고생을 견디면서, 기어오르다가 다른 사람의 발길에라도 차여 미끄러지더라도 좌절하지 않고 충혈된 눈을 부릅뜨면서 각오를 새롭게 하고 그 좁고 가파른 상승의 통로를 향해 끊임없이 기어오르곤 했다.

경제 침체와 신분 고착은 자본주의의 위기다

그러나 이제 한국 사회는 그런 기어오르기의 희망이 사라지고, 그런 충혈된 눈들이 사라져간다. 흔히 말하듯 이제는 한국 사람들이 배가 불러서인가. 그보다는 경제 위기 속에서 밑바닥 서민들은 갈수록 궁지로 내몰리고 있는데, 이제 더 이상 기어오를 방도도 희망도 없기 때문이 아닐까. 이미 기어오른 사람들이 다른 사람들이 기어오르지 못하도록 자신이 타고 기어올라간 사다리를 치워버리고 기어오르는 길을 막아버리는가 하면, 도저히 기어오를 수 없을 만큼 더 높은 성벽을 쌓아버렸다. 예전에 한국 사회에서 누구에게나 가장 넓게 열려 있고, 가장 빠르고 공정하게 기어오를 수 있는 통로였던 교육도 이제는 신분 이동의 통로가 아니라 신분 고착과 신분 재생산의 메커니즘으로 바뀌었다.

기어오르기가 더 이상 불가능할 때, 남는 선택은 ‘끌어내리기’와 ‘들이받기’뿐이다. 과거와 다른 차원의 충혈된 부릅뜬 눈, 세상에 대한 적의와 악의로 충혈된 눈을 부드럽게 풀어주는 탈출구는 어디 있는가. 지금 한국 경제의 위기는 제조업의 위기를 넘어 한국 자본주의 문화의 위기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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