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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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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통령의 전화/ 김명인

등록 2004-05-27 00:00 수정 2020-05-02 04:23

최근에 인터넷을 통해 고문 끝에 죽은 한 이라크 청년의 주검 위에서 익살스러운 표정과 포즈를 짓고 있는 남녀 미군병사가 있는 사진 두장을 보았다. 지난주에는 직접 보지는 못했지만 미국 민간인이 참수형을 당하는 장면이 담긴 동영상의 소식을 들었다. 더 얼마 전에는 세상을 떠들썩하게 한 이라크 포로에 대한 미군의 성적 학대 사진들을 보았다. 그리고 더 얼마 전에는 이라크인들이 미국인의 주검을 끌고 다니거나 두들겨 패는 텔레비전 화면을 보았다.

이라크 · 광주 · 베트남… 지옥의 장면들

그보다 더 오래 전에는, 그래봐야 올해의 일이기는 하지만 이스라엘의 미사일 공격으로 즉사한 팔레스타인 지도자의 상반신밖에 안 남은 주검을 부여잡고 울부짖는 한 팔레스타인인의 사진을 보았다. 그리고 그보다 더욱더 오래 전에는 미군의 장갑차에 깔려 죽은 두 소녀의 주검을 보았다. 그보다 더 오래 오래 전에는 성기에 병이 꽂힌 채 죽어 있는 한 처녀의 주검을 보았고, 더욱더 오래 오래 전에는 광주에서 M16에 얼굴이 반쯤 달아나거나 뇌수가 쏟아져 나온 광주 시민들의 사진을 보았다. 아주 아주 오래 전에는 베트남 밀라이촌 위를 날아다니는 파리떼들의 사진을 본 적도 있다.

나는 이 모든 일에 미국이 직·간접적으로 관련돼 있고, 그래서 미국이 악의 축 중의 악의 축이라는 말을 하려는 게 아니다. 그런 말은 내가 아니라도 누군가 할 것이다. 나는 갑자기 이런 세상을 살고 있는 내가 갑자기 비참해졌을 뿐이다. 이게 겉보기만 평온한 세상이지 사실은 지옥에 다름없는 것 아닌가 하는 생각. 세상 한 군데가 지금 지옥인데 다른 곳이 천국일 수는 없다.

약속은 지켜져야 한다. 나도 어쨌든 약속을 지키며 살고자 노력한다. 약속을 잘 지키지 않는 사람에게 신뢰가 덜 가는 것도 사실이고, 내가 그렇게 신뢰성 없는 사람처럼 보이는 건 대체로 견디기 어렵다. 하지만 아무 약속이나 다 지키는 것은 아니다. 때로는 약속을 잊기도 한다. 그런 경우는 그 일이 정말 무의미하거나 나중에 생각해보니 안 지켜도 좋을 약속이었다거나 또는 지키는 것이 더 나쁜 결과를 낳는 때이다. 아니 때로는 미움을 받더라도 이행하지 못할 약속도 있는 것이다. 심지어는 이행하지 않음으로써 매우 큰 손해를 보기도 한다.

이를테면 너무 가난해서 고리채를 빌렸는데 갚겠다는 약속을 못 지켜서 차압을 당하기도 하고 협박과 공갈에 폭행까지 당할 수 있는 것이다. 패가망신은 못하겠는가. 그런데 말이다. 만약 그 경우 고리채를 빌려준 자가 워낙 악인이라 다른 사람 하나를 죽여주거나 아니면 좀 때려주면 빚을 탕감해주겠다 그러면 어쩔 것인가. 그렇더라도 나는 그냥 패가망신하는 길을 택할 것이다.

두달 만에 정무에 복귀한 노무현 대통령이 며칠 전 부시 미 대통령과 통화를 했다고 한다. 국민들을 설득하는 중인데 파병 약속은 어떻게든 지키겠다고 했다고 한다. 그 때문에 집권여당 내에서는 파병 반대론이 위축되고 있다고 한다. 진정으로 자기 가족을 사랑하는 가장이라면 자기 고리채 때문에 채권자의 사주 아래 남을 고통에 빠뜨리는 일은 하지 않을 것이다. 남을 사랑할 줄 아는 사람이 제 식구도 사랑할 줄 아는 것이다. 피묻은 손으로 던져진 피묻은 돈으로 허기를 채워야 하는가. 그래야 한다면 그것처럼 비참한 일은 없을 것이다.

비참하게 파병하느니 패가망신 택하리

나는 노 대통령이 그런 지도자라고는 믿지 않는다. 파병 약속 재확인이나 하라고 광화문 네거리에 나가 촛불 들고 탄핵 철회를 외친 것은 아니다. 우리 더 이상 비참해지지는 말자. 부시와의 약속을 안 지키면 당장 경제가 흔들려서 모두 거리에 나앉게 된다고 한들, 내가 아는 노 대통령은 “파병 약속은 없던 걸로 할 테니까 잠시 깡통을 차게 되더라도 국민 여러분이 좀 어려움을 참아주세요”라고 말할 사람이라고 믿는다. 어떻게 나 살자고 남을 죽이는 데 가담하는가. 세상에 생지옥이 있다는 것도 비참한 일인데 어떻게 지옥을 만드는 일에 힘을 보탤 수 있는가. 가난하게 살더라도 인간의 얼굴을 하고 살아야 할 것 아닌가. 죽은 사람의 얼굴 위에서 웃으며 V자를 그리는 그런 얼굴로 살 수는 없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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