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겨레21 편집장 배경록 peace@hani.co.kr
4·15 총선이 끝난 뒤 자주 들리는 얘기가 “우리 국민은 역시 위대하다”이다. 심지어 “국민들의 깨끗한 손이 그려낸 ‘황금분할’은 역시 절묘했다”며 우리 국민의 정치의식 수준을 극찬하기도 한다. 그런 부류의 수사(修辭)들을 깊이 음미해보면 열린우리당과 한나라당으로 향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과반을 확보한 열린우리당과 기대 이상의 의석을 얻은 한나라당 지지자들에게는 흡족한 선거결과이기 때문이다.
탄핵 주도 세력에 대한 심판이란 측면에서 열린우리당에게 과반의석을 몰아준 것은 분명 ‘위대한’ 민심이다. 민주노동당이 역사상 최초로 국회에 진출함으로써 이제 정치뿐 아니라 사회 전반이 진보와 보수의 양 날개로 날게 됐다는 점도 ‘깨끗한 손’이 그려낸 절묘한 선택임이 분명하다. 그러나 민주당과 자민련에게는 가혹한 심판을 내린 반면 탄핵의 ‘주범’ 격인 한나라당에 무려 121석을 안겨준 민심은 쉽게 납득하기 어렵다. 때문에 이번 총선을 통해 지역주의가 완화됐다고 하지만 영남권의 지역주의는 여전히 애물단지로 남게 됐다.
그런 점에서 17대 총선 역시 기대와 실망이 엇갈리는 결과를 남겼다. 이제 정치권은 그 기대에 부응하고 실망을 희망으로 바꾸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할지 고민해야 한다. 선거가 끝나자마자 탄핵을 놓고 첫 대결을 하고 은근히 세를 과시하는 모습은 그래서 실망스럽다.
선거 다음날 정동영 열린우리당 의장이 탄핵 문제의 정치적 해결을 위한 양자 회담을 박근혜 한나라당 대표에게 제안했고, 권영길 민주노동당 대표도 같은 날 노 대통령의 사과를 전제로 열린우리당, 한나라당, 민주노동당 3당 대표회담을 제안했다. 그들의 제안이 이라크 파병 문제를 매듭짓고 경제 살리기 등 국정 현안을 챙기기 위해 대통령의 복권이 시급하다는 ‘충정’에서 나온 것임을 모르는 바는 아니다.
그러나 선거 직후인데다 과반의석을 확보했거나 처음, 그것도 제3당으로 원내에 진출했다는 점 때문에 오만과 자만으로 비칠 수도 있다. 법치(法治)를 외면하고 인치(人治)를 내세우고 있는 것으로 읽히기 때문이다. 어쨌든 절반을 조금 넘는 국민들이 철회보다는 헌법재판소 결정을 지켜보자고 하는 마당이고, 헌재도 결정을 서두를 수밖에 없는 상황인데 왜 그렇게 조급한지….
한·민·자 연합이 탄핵안을 가결시킨 것은 법치보다는 수적인 우세를 앞세운 인치임이 분명하다. 그런 인치가 오만과 독선에서 비롯됐음이 확인돼 국민들이 분노하고 심판하는 것을 지켜보지 않았던가. 첫 단추가 잘못 채워졌다고 해서 아예 옷을 벗어버리자는 것은 한·민·자와 마찬가지로 인치를 되풀이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재선에 성공한 열린우리당의 한 소장파 의원이 헌재 권위에 흠집을 내는 발언을 하거나 민주노동당이 원내 교섭단체 구성에 집착하는 모습을 보이는 것도, 국민들 눈에 어떻게 비칠지 걱정스럽다.
열린우리당과 민주노동당은 지금 ‘샴페인’을 터뜨리기보다는, 쓴 ‘소주’잔을 기울이며 ‘위대한 민심’의 참뜻을 되새겨보는 시간을 가져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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