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칸디나비아라든가 뭐라구 하는 고장에서는 아름다운 석양 대통령이라고 하는 직업을 가진 아저씨가 꽃리본 단 딸아이의 손 이끌고 백화점 거리 칫솔 사러 나오신단다. 탄광에서 퇴근하는 광부들의 작업복 뒷주머니마다엔 기름 묻은 책 하이데거, 러셀, 헤밍웨이, 장자. 휴가여행 떠나는 국무총리, 서울역 삼등대합실 매표구 앞을 뙤약볕 흡쓰며 줄지어 서 있을 때 그걸 본 서울역장 기쁘시겠소라는 인사 한마디 남길 뿐 평화스레 자기 사무실 문 열고 들어가더란다. …황토빛 노을 물든 석양 대통령이라는 직함을 가진 신사가 자전거 꽁무니에 막걸리병을 싣고 삼십리 시골길 시인의 집을 놀러가더란다.
‘석양 대통령’을 꿈꾸는 시인
시인 신동엽은 36년 전에 이런 몽상을 시로 썼다. 이런 아름다운 몽상은 물론 아직까지 몽상의 왕국에 머물러 있다. 이런 몽상은 시인이 목놓아 외친 것처럼 ‘껍데기들’이 다 가고 나서도 한참 뒤에야 현실세계에서 실현될 것이다. 시인이 몽매에도 바랐던 나라, “아사달 아사녀가 중립의 초례청 앞에 서서 부끄럼 빛내며 맞절하는” 그런 나라, 더 이상 외세에 휘둘리지 않고 더 이상 사람이 사람을 착취하거나 억압하지 않고, 더 이상 상품이 인간 위에 있지 않은 나라가 오더라도 이런 몽상은 그 한참 뒤에야 현실이 될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경제의 문제도 정치의 문제도 아닌 문화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문화는 늘 그렇듯 아주 천천히 변화한다. 왜냐하면 그것은 그것을 담지한 인간 의식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인간의 의식처럼 변화하기 힘든 것이 있을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인들은 너무나 먼 앞날의 이야기를 시로 쓴다. 마치 내일 당장이라도 그렇게 되어야 하는 것처럼, 그렇게 되지 않으면 못 견딜 것처럼 눈만 뜨면 꿈같은 소리를 늘어놓는다. 헛소리를, 세상에 아무 쓸모도 없는 헛소리를 그렇게 밑도 끝도 없이 늘어놓는다. 도대체 왜 시인들은 그런 몽상과 헛소리들에 사로잡혀 사는가. 그것은 그 몽상과 헛소리가 언젠가는 현실이 될 것이라는 믿음 때문이다. 아니 그렇게 되지 않으면 안 되기 때문이고 어쩌면 내일 기적처럼 그렇게 될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인간의 의식은 완강하게 보수적이지만 꿈은 그렇지 않다. 꿈은 급진적이다. 그리고 꿈은 급진적일수록 더 간절하고 그만큼 현실 속에서 실현 가능성이 높아진다. 애초에 가당치 않은 꿈은 꾸지 않으며, 진짜 헛소리는 생각나지 않는 법이다. 서울역에서 평양 가는 기차표를 달라고 생떼 쓰는 시를 발표했던 문익환 목사는 1년도 지나지 않아 정말 평양에 갔으며, 이제 보통 사람들도 서울역에서 평양행 기차표를 구하는 일이 버스 타고 금강산 가는 것처럼 아무렇지도 않게 될 날이 머지않았다. 그렇게 간절한 몽상은 어느 날 갑자기 현실이 되는 것이다.
바야흐로 민주노동당 소속의 국회의원이 탄생하고 있다. 보수정당의 노동계 영입 인사가 아닌, 일부 노동귀족 출신들이 아닌, 정통 노동운동가들이 바로 그 ‘노동자 정당’의 깃발을 대한민국 국회 안에 꽂게 되었다. 세계 10대 교역국 시대, 국민소득 만달러 시대의 말로는 주역이지만 사실은 천덕꾸러기 취급을 받아온 남한 노동자 계급이 마침내 의회에 그 교두보를 마련하게 된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오랜 몽상이 현실이 되는 순간이 아닌가. 50여년 전 진보당을 만들었던 조봉암이 이승만 정권에 의해 법살된 이래 한갓 몽상에 불과했던 진보정당의 의회 진출이 이제 현실이 된 것이다. 비록 교섭단체도 만들 수 없는 소수정당이고, 자칫하면 ‘한국에도 진보정당이 있다’는 선전에 구색을 맞춰주는 꼴이 될 수도 있지만 민주노동당의 의회 진출은 부르주아 정당 일색의 한국 정치판에 의미 있는 파열구를 낸 일대 사건이라 아니할 수 없다.
진보정당의 몽상은 계속된다
한 몽상의 실현은 또 다른 몽상의 출발이다. 36년 전 한 시인이 꿈꾸었듯이 광부들이 하이데거를 읽고, 대통령이 자전거에 막걸리 싣고 시인 친구의 집에 놀러가도 아무렇지 않은 세상, 하나같이 대학 나온 농민들이 대리석 별장에 살며 지휘자와 극작가 이름을 훤히 아는 세상. 애당초 어느 패거리에도 총 쏘는 야만엔 가담하지 않기로 작정한 지성이 당연한 세상을 향한 꿈이, 진보정당의 의회 진출이라는 꿈이 실현된 바로 그 자리에서 새롭게 꾸어져야 하고, 그 꿈 또한 우리 스스로 포기하지 않는 한 언젠가 예기치 않은 순간에 이루어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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