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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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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에 잘 할 걸’ 후회도 잠시… 피뽑기, 그 끝없는 몸개그

전남 곡성 편
논물 잘못 잡은 탓에 ‘벼 반, 피 반’… 벗들도 예초기도 맥 못 추고 흙탕물 세례만
등록 2025-08-14 22:20 수정 2025-08-17 07:34
물 잘못 잡은 논에서 벼와 함께 피가 무성하게 자랐다.

물 잘못 잡은 논에서 벼와 함께 피가 무성하게 자랐다.


논농사의 절반은 모내기 뒤 물을 얼마나 잘 잡느냐에 있다. 물을 잘 잡아 피가 올라오지 않게 하는 것이 한 해 농사에서 고생을 많이 하느냐 덜 하느냐를 결정한다. 그렇다. 나는 물을 잘못 잡았다. 피가 논 한가득 올라왔다. 피를 초반에 잡으면 그나마 고생이 덜하다. 그렇다. 나는 피를 초반에 잡지 못했다. 피와 지난해 떨어졌던 볍씨가 발아해 뿌리를 깊게 박고 난 뒤에 피뽑기를 하는 중이다.

맨 처음, 쭈그려서 서너 시간 피를 뽑았다. 이때만 해도 풀이 연한 상태라 생각보다 잘 뽑혔다. 노래 들으면서 맨발로 진흙을 물컹 밟으면서 풀을 뽑으니 시간 가는 줄도 몰랐다. 재밌게 했다. 그러나 종일 쭈그려 앉아 있던 탓이었을까. 다음날은 근육통으로 하루를 통으로 쉬어야 했다.

다리를 펴서 할 수 있으면 그나마 좀 괜찮지 않을까. 철물점에서 논바닥을 긁어내 잡초를 뿌리까지 뽑을 수 있는 3만원짜리 도구를 샀다. 한두 번 잘 먹히는 듯하더니, 뿌리가 깊숙이 박힌 데는 이걸로 뽑히지 않는다. 그래도 안간힘 쓰며 꽤 풀을 뜯어냈다.

혼자라면 막막한 이 피뽑기. 친구들과 함께라면 잘할 수 있지 않을까. 함께 모임을 하는 친구 두 명을 불러 같이 뽑기로 했다. 모임이 끝나고 오후 4시. 해가 뜨겁다는 핑계로 낮잠 한숨 자고 오후 5시에 시작했다. 아뿔싸. 그사이 땅이 딱딱해 풀이 뽑히질 않는다. 피 뽑는 도구로 논바닥을 긁는 게 아니라 곡괭이처럼 논둑을 박아서 흙을 아예 엎어버렸다. 힘이 배로 들었다. 결국 금방 저녁 시간이 다가와 친구들을 데리고 중국집에서 맛있는 음식을 사줬다.

아는 이웃 분이 이번엔 예초기에 꽂아서 쓸 수 있는 일명 ‘논다매’를 빌려주셨다. 이것만 있으면 논을 다 맬 수 있단 말인가. 큰 기대를 하고 빌려왔다. 그러나 전기 예초기엔 맞지 않은 크기. 결국 벼와 벼 사이를 자를 수 있는 크기의 날만 바꿔 사용해보기로 했다. 문제는 벼 높이만큼 자라버린 피 때문에 구분이 어려웠다. 하나씩 하나씩 들춰 잘라야 할 곳을 봐가며 풀을 베야 했다.

물컹물컹한 진흙을 한 발씩 밟으며 풀을 벤다는 것은 보통 일이 아니었다. 그때였다. 장화가 진흙에 박혀 나오지 않으면서 균형을 잃어 예초기가 흙탕물 가득한 논바닥을 훑었다. 흙탕물이 사방에 퍼지며 내 온몸을 뒤집어씌웠다. 얼굴이 온통 진흙투성이가 되어 눈만 껌뻑인 채 한참을 가만히 있었다. 논물로 눈가를 씻어내고 다시 시작. 그러다가 몇 번을 흙탕물을 맞으며 피를 제거했다. 첫 논둑을 시작으로 끝 지점까지 한 줄을 그렇게 가니, 도저히 힘이 빠져 못하겠다. 내일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아직도 많이 남았다. 나머지는 그냥 놔버릴까 하는 생각이 자꾸 올라온다. 진작에 물을 잘 채워놨으면 이런 고생을 하지 않았을 텐데 하는 아쉬움이 든다. 어쩌겠는가. 나는 실수해버렸고, 이미 일이 벌어진 것을. 받아들이고, 조금씩 조금씩 할 수 있을 만큼이라도 해야 하지 않을까.

 

글·사진 박기완 글 짓는 농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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