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높이, 더 멀리 날아오르고 싶었다. 빛나는 태양에 가까워지고 싶었다. 그렇게 매일같이 쇼핑했고 집 앞에는 택배 상자가 쌓여갔다. 하지만 섬유 조각을 덕지덕지 엮은 밀랍 날개는 뜨거운 열기에 다가갈수록 흉하게 녹아 바다로 떨어질 게 뻔했다.
딱 1초. 1초였다. 화려해 보이던 내 날개가 가짜라는 걸 깨닫게 된 순간. 가짜 날개를 기꺼이 불태워야 더 높이 날 수 있단 걸 어렴풋이 알게 된 순간. 옷을 사지 않기로 결심했던 6년 전 그 순간.
사람으로 태어나, 소비자로 자랐다. 입을 것도 먹을 것도 오죽 많으면, ‘오늘 뭐 입지?’ ‘오늘 뭐 먹지?’가 일생일대 고민이다. 택배 상자를 기다리는 게 시대를 관통하는 기쁨으로 여겨지고, 단전에서 끓어오르는 분노쯤은 ‘금융치료’로 해결한다. “어머, 언니. 옷을 뭐 얼마나 오래 입으려고 그래. 한 계절 입고 버리는 거지, 뭐.” 누구도 멀쩡한 옷을 유행이 지났다는 이유로 버리기에는 아깝다고 생각하지 않는 행복한 날이 오고야 말았다.
그날도 나는 쇼핑을 즐기고 있었다. 밥 먹듯이, 숨 쉬듯이 쇼핑하던 나는 그날도 미국의 한 대형 쇼핑몰 세일 코너에서 쇼핑하다 마음에 드는 패딩을 발견했다. 은밀한 손길로 빠르게 가격표를 살펴보니 1.5달러였다. 처음엔 눈을 의심했다. 잠깐, 정말로 우리나라 돈으로 2천원도 안 되는 가격이라고? 방글라데시에서 만들어 미국으로 온 이 옷은 어떻게 2천원이라는 가격에 팔릴 수 있는 거지? 부드러운 솜털이 가득 찬 패딩이 갑자기 천근만근이라도 되는 듯 무겁게 느껴졌다. 혼란스러웠다. 옷이 뿜어내는 먼지 가득한 공기, 무덤처럼 쌓인 옷을 파헤치는 사람들, 내 손목에 축 처진 채 매달려 있는 ‘건진’ 옷들. 이 모든 게 낯설게 느껴졌다. 이런 가격이 어떻게 가능한 거지?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걸까?
하두리캠, 싸이월드, 얼짱시대, 페이스북, 인스타그램을 거쳐온 나의 세상에서 쇼핑은 일상 그 자체였다. 인생샷을 찍기 위한 일회용 옷, ‘사복 패션 레전드’를 찍은 한 패셔니스타의 키링, 결혼식에 가려면 하나쯤은 있어야 하는 명품백까지. 도무지 하차하려야 하차할 수 없는 빠른 속도로 돌아가는 유행의 쳇바퀴 위에서, 쇼핑과 패션은 그림자처럼 내 인생의 모든 기쁘고 슬픈 순간에 끈질기게 달라붙어 있었다. 무엇을 사고 있는지 또 사야 하는지 몰랐지만, 재킷 주머니에는 구겨진 카드 영수증이 잔뜩 쌓여갔다.
분명 멋있어지고 싶었다. 가장 유행하는 최신 트렌드의 옷을 입으면 멋있어질 수 있을 거라고 믿었다. 영원히 손에 잡히지 않는 그 트렌드가 나를 좀먹고 있는 줄은 몰랐다. 오랜 기간 무수히 많은 옷을 사왔지만, 매일 아침 나는 ‘오늘은 또 뭐 입지’라는 피로한 질문으로 하루를 시작했다. 그렇게 많은 옷을 소비해도 단 하나 나 자신만은, 내 삶만은 내 것으로 소유하지 못했다. 형형색색의 옷들 속에서 색채를 잃어가는 듯했다. 옷장도 나도, 육중한 옷과 쇼핑을 지탱하며 간신히 버티고 있을 뿐이었다.
충격적일 정도로 저렴한 옷을 내려둔 채, 여느 때와 달리 빈손으로 집에 돌아온 나는 그날 밤 몇 번의 검색만으로 값싼 옷의 비밀을 파헤칠 수 있었다. 대량생산과 대량소비, 물건이 있어 소비하는 게 아니라 ‘트렌드’나 ‘유행’이라는 이름으로 소비를 유도해내 물건을 존재하게 하는 기이한 산업 구조, 쇼핑. 아름답게만 보였던 옷들은 개발도상국에 살아가는 내 또래 여성 노동자들의 삶에, 목화를 키우는 농부의 삶에, 우리가 살아가는 이 생태계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고 있었다. 옷에 숨겨진 진실을 들여다보게 된 그날 이후, 나는 ‘작고 소중한 취미’라고 생각했던 쇼핑을 멈췄다. 쇼핑몰에 업데이트된 신상품을 무한으로 내려보는 일도 멈췄다. 그리고 내가 정말 사랑하는 것들로 나의 삶을 채워가기로, 새 옷이 아닌 나만의 멋을 만들어가기로 결심했다.
쇼핑을 멈추는 것은 생각보다 큰일이었다. 기분이 안 좋을 땐 뭐라도 사라고, 기분이 좋으면 그것에 맞게 쇼핑하라고, 그게 네가 존재하는 방식이자 이유라고 온 세상이 외치고 있으니 말이다. 지하상가를 오가며 5천원, 1만원짜리 옷을 일상적으로 구매하던 나와 내 친구들은 월급을 받기 시작하면서 ‘결혼식에 갈 때 들 만한 명품백’ 하나는 있어야 한다며 또 다른 위시리스트를 새롭게 꾸려나가기 시작했다. 죽지도 않고 새롭게 나타나는 게임 속 몬스터들처럼 내가 사야 하는 옷들은 내 생애 주기에 따라, 삶의 단계에 따라 끈질기게 맞춰 진화하며 곳곳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최근에는 글로벌 커머스 플랫폼 ‘테무’ ‘알리’까지 등장했다. “이래도 안 사?”라고 이야기하는 듯한 옷의 가격은 충격적일 정도로 저렴해지고 있다. 그에 응답하듯 2023년 10월에는 20여 년 만에 처음으로 한 달 온라인쇼핑 거래액이 20조원을 돌파했다. 더욱 극단적으로 변한 날씨, 길어지는 여름과 겨울 앞에 사람들은 또다시 ‘소비’를 택했다. 폭주하는 유행과 트렌드, 착취로 가능해진 초염가의 환상적인 컬래버레이션 사이에서, 우리는 무언가를 사는 것보다 안 사는 것이 더 힘들어진 일상을 살아가고 있었다.
따라서 “옷을 사지 않기로 했습니다”는 일종의 해방 선언이었다. 소비하고 또 소비하기를 강요받던 20대 여성이, 소비의 권유로부터 벗어나겠다는 선언. 드디어, 무언가를, ‘안’ 사보겠다는 다짐. 새 옷 사기를 중단하는 것이 훗날 얼마나 큰 파도가 되어 내 일상 전체를 흔들게 될지 상상도 못 한 채 나는 다짜고짜 쇼핑하지 않겠노라 선언해버렸다.
“그래도 옷 사는 재미가 있는데, 무슨 재미로 살아?”
가끔 정말 궁금하다는 듯이 물어오는 친구들의 질문이다. 처음 옷을 사지 않기로 결심했을 때, 가장 씁쓸하기도 했던 부분이다. 패션 산업의 문제 해결을 위해 개인의 즐거움을 포기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것이 큰 착각이었음을 발견하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나의 ‘옷 안 사기 결심’이 곧바로 개발도상국 여성 노동자의 삶에, 쓰레기 산에서 풀 대신 헌 옷을 씹는 소의 인생에 변화를 가져온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지극히 개인적인 측면에서 변화가 생기기 시작했다. 바로… 시간과 돈을 아끼게 된 것이다!
나는 한때 매일 저녁 출입문 앞에 놓인, 쇼핑몰에서 배송된 구겨진 비닐 포장지를 집어든 채 귀가하곤 했다. 이는 곧 구겨지듯 타야 했던 지하철 안에서도, 고단한 하루를 마무리하는 침대 위에 누워서도, 퍼런빛을 뿜어내는 스마트폰 화면을 끊임없이 넘기며 옷을 가상의 장바구니에 담아야 했다는 뜻이다. 옷을 사지 않기로 하고, 나는 멈추지 않을 것만 같던 굴레에서 드디어 내릴 수 있었다. 잃어버린 시간을 되찾았다. 그리고 내가 살아가는 이 땅에 대하여, 함께 살아가고 있는 존재들에 대하여 생각하게 됐다.
사흘 전 직장 옆자리 동료가 어떤 색깔의 바지를 입었는지 기억하는가? 그가 그 전날에 입은 바지는 무엇이었는가? 혹여 누군가가 정말로 내 옷차림을 평가하고 있다고 해도, 그러니까 내가 월요일에 입은 바지와 수요일에 입은 바지가 똑같다고 비난하는 사람이 있다고 해도, 그의 시선에 심리적으로 얼마나 많은 영향을 받을지 말지는 전적으로 나의 몫일 것이다.
이 작고도 큰 결심 안에서 나는 자주 실수하지만 끝내 성공해내며 나만의 멋을 찾아가고 있다. 옷을 사지 않기로 결심한 지 어느덧 6년, 사는 것(Buy)만이 삶의 전부인 것처럼 여겨졌던 큰 웅성거림이 작은 소음으로 쪼개져서 들리기 시작했다. 많은 ‘평범’했던, 사실은 굉장히 수상했던 그 일상들에 ‘이건 내 몫이 아니었어’ 하고 선을 그을 수 있게 됐다.
네모반듯한 공허한 새 쇼핑백을 어깨에 두르는 것보다 소중한 사연이 차곡차곡 담긴 헌 옷을 서로 교환해 입는 게 더 좋다. 좋아하는 노래를 틀어두고 구멍 난 양말을 꿰매어 신는 게 더 좋다. 엄마의 젊은 날이 녹아 있는 옷장 문을 열고 추억이 깃든 옷을 꺼내 내 일상에 살포시 포개는 게 더 좋다. 그 누구도, 그 어떤 것도 불필요하게 착취하거나 낭비하지 않고 살아가는 것, 그것이 내게는 멋이자 패션이다.
분명 누군가는 옷 한 벌을 사면서도 오롯이 존재하기도 하고, 또 누군가는 어떤 대상을 사랑한다고 하면서도 그 감정마저 쉽사리 소비의 대상으로 전락시키기도 할 것이다. 하여 이 모든 고민에 대한 답이 항상 ‘소비 중단’ 혹은 ‘경제 활동 종료’를 뜻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그러니 스스로 질문해보자. 끊임없이 소비하고 지배하며 나 자신마저도 소비의 대상으로 전락시킬 것인가. 살아 있다는 것 자체로 충만한 만족을 느끼며 순간순간 존재할 것인가. 그래서 오늘도 지키기 어려울 수 있는 그 다짐을 혼자 되뇌어본다. 옷을 사지 않기로 했습니다.
사람들에게 ‘나 옷 안 사요!’라고 소문내기 시작하면, 멀쩡한 옷들이 선물로 들어오기 시작한다. 누군가가 버릴 옷이 내게는 새 옷이 된다는 것은 꽤 즐겁고도 감사한 경험이다. 한번은 회사 동료가 바구니째 옷을 가져왔다. 내가 입고 싶은 옷을 하나씩 골라서 가져가면, 나머지는 도로 가져가 팔거나 기부하겠다고 했다. 점심시간이 끝나고 도란도란 모여 중고 옷 언박싱을 하자, 다른 동료들도 몰려와 구경하기 시작했다. “이 옷은 결혼하기 전에 잘 입었는데… 이제는 못 입겠더라.” 옷에 얽힌 사연도 하나씩 들을 수 있었다. 그렇게 동료에게 받은 옷을 1년 뒤 유럽으로 퇴사 기념 여행을 떠나며 가져갔다. 여행지에서 찍은 사진과 함께 동료에게 줄 작은 선물을 사서 돌아왔다. ‘옷 줄 거 생겼는데 만나.’ 오랜만에 연락을 해오는 친구들의 메시지도 반갑다. 그렇게 선물받은 중고 옷들을 펼쳐 옷장에 걸다보면, 옷이 아니라 추억이 하나씩 쌓이는 느낌이다.
유행은 돌고 돈다. 그러므로 오래도록 옷장 안을 차지하던 옷들에도 반드시 때가 온다. “엄마가 빨간색 립스틱에 가죽 재킷을 입던 때가 있었어?” 엄마의 옷장을 뒤적이다 보면 옛 사진까지 들춰보게 되고, 그날 밤은 이야기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진다. 중요한 약속이 있을 때마다 옷장 앞에서 발을 동동 구르는 일도 줄었다. 엄마가 내 나이 때 입었던 20년, 30년 된 옷들이 나와 함께하게 된 덕분이다. 처음으로 엄마와 함께 간 유럽 여행에서 엄마가 젊은 시절 입던 옷들, 오래전에 샀던 옷을 수선해 입는 내 모습을 바라보던 엄마는 연신 ‘하이고, 이 옷들이 얼마나 오래된 건데 왜 여기까지 입고 와서. 그냥 새 옷 하나 사지’라고 한마디씩 했다. 그런데 그런 말을 할 때면 엄마는 꼭 당신의 팔로 내 팔을 부드럽게 감싸며 팔짱을 끼곤 했다. 입꼬리도 슬쩍 올라가 있었다. 내가 엄마 옷을 입는 것도, 엄마가 그 옷을 입은 나를 바라보는 눈빛도, 핀잔을 한마디 하는 것도, 결국 다 사랑한다는 뜻임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세상에 이미 나온 옷을 바꿔 입는 것만으로도 우리는 충분히 풍성한 의생활을 할 수 있지 않을까? 그 상상을 현실로 가능하게 만든 곳이 있다. 비영리 스타트업 다시입다연구소의 옷 교환 행사 ‘21프로(%)파티’다. 21프로파티는 사단법인 다시입다연구소가 2020년 시작한 의류 교환 행사다. 평균적으로 자기가 가진 옷의 21%는 안 입는다는 연구소 자체 설문조사 결과에서 착안했다.
이곳에서는 옷을 쇼핑할 때 돈이 필요 없다. 아니, 오히려 돈을 주고도 옷을 살 수 없다. 자신이 입지 않는 헌 옷, 그리고 그에 대한 이름과 이야기를 붙여주어야만 새로운 옷을 데려갈 수 있다. 21프로파티에서는 옷에 가격표 대신 사연 카드가 붙어 있다. 언제 산 옷인지, 얼마나 자주 입었는지, 새로운 주인에게 보내는 이별의 메시지 등을 손으로 직접 적어 내려가야 한다. 검분이, 쵸니, 복숭이… 21프로파티에 나온 옷들에는 저마다 이름과 옷을 떠나보내는 주인의 가벼운 인사가 붙어 있다. 이 말들을 읽고 나면 옷을 데려가는 마음가짐이 새로워질 수밖에 없다. 단순히 돈을 치르고 옷을 ‘구입하는’ 게 아니라 내 공간과 내 삶에 ‘데려오는’ 감정이 크다. 사연과 함께 교환해온 옷들은 그래서 내게 더 특별하다.
이소연 작가·‘옷을 사지 않기로 했습니다’ 저자
* 본 기획물은 정부광고 수수료로 조성된 언론진흥기금의 지원을 받았습니다.
*한겨레21 '당신이 버린 옷의 최후' 보도는 12월27일부터 2025년 1월2일까지 매일 이어집니다. 전체 기사가 담긴 한겨레21 통권호(1545호)는 아래 링크에서 구매할 수 있습니다. https://smartstore.naver.com/hankyoreh/products/113013057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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