옷차림이 점점 가벼워지고 밭에 싱그러운 초록색 싹이 올라오기 시작하니 마음이 부푼다. 작년에 묻어둔 작물을 기대하며 밭으로 나가는 기분이란 꼭 만기된 적금을 찾으러 가는 기분이랄까. 당장 먹을 것을 기르는 일년생 작물과 달리 다년생이거나 월동하는 작물의 씨앗을 미리 뿌려두는 일은 꼭 적금을 넣는 것과 같은 기분이다. 이율은 높지 않지만 한땀 한땀 모아놓은 걸 크게 돌려받게 되니까. 밭으로 걸어가는 잠깐 사이(집에서 밭까지의 거리 180m)에 작년에 넣은 예금을 떠올려본다.
작년 양평에서 친구 이파람을 도와주고 선물 받은 루바브 모종을 제일 먼저 찾는다. 2~3년째 되는 해부터 수확할 수 있어 미래를 기대하며 애지중지 돌봤건만 처음부터 빈자리였던 듯 흔적조차 보이지 않는다. 커다란 근대처럼 생긴 루바브는 새빨간 줄기가 새콤하다 못해 시큼한 맛을 내는 식물인데 프랑스에서는 깍두기처럼 덜렁덜렁 썰어서 설탕에 버무려 먹는다. 신맛을 워낙 좋아해 몇 해 전 충주의 와이너리 농장 ‘레돔’에서 파이로 구워 내놓은 걸 맛보고는 푹 빠져버렸는데, 진정한 농사꾼이라면 좋아하는 맛 정도는 스스로 길러 먹을 줄 알아야 한다. 비록 상환조차 못한 투자였지만 언젠가는 꼭 내 손으로 길러 먹고 말리라!
버스정류장 쪽으로는 쓰레기를 버리지 말라는 의미로 튤립이며 무스카리며 알리움 같은 추식구근을 잔뜩 사다 심었는데 발아율이 썩 높지 않다. 어쩐지 작년 가을부터 밭에 고양이가 자주 보이더니 야생동물이 파놓아 나뒹구는 구근의 흔적이 여기저기 보여 마음이 쓰다. ‘어깨에서 사서 무릎에서 판다’는 기분이 딱 이런 걸까? 원금도 돌려받지 못한 추식구근은 이제 그만 내년의 적금 목록에서 지워야 하지 않을까? 처음으로 고양이가 원망스러워진다.
하지만 잃는 것이 있으면 얻는 것도 있는 게 인생. 밭 입구로 작년 구근을 두어 개 얻어 심은 독일붓꽃의 세력이 잔뜩 늘었고, 올해는 에린지움이 월동을 했다. 텃밭은 물 빠짐이 잘되지 않는데다 남쪽 해도 막힌 땅이라 꽃을 심어놓고도 걱정하는 게 일인데, 꽃을 과감하게 늘려봐도 좋다는 뜻일까? 자급도 해야 하고, 사치도 부리고 싶은데 땅이 좁은 도시농부는 마음만 동동거린다.
에린지움 옆으로는 셀프시딩(self-seeding)을 한 보리지 싹이 올라왔다. 보리지는 오랫동안 돌보는 방법을 몰라 제대로 기르지 못하고 속절없이 보낸 식물이었다. 그런데 틀밭을 정비하고 기르니 재작년부터 사람 키만큼 자라났다. 특유의 커다란 덩치와 은회색과 보랏빛을 띤 색감으로 텃밭을 기품 있게 꾸며줬다. 게다가 오이 향을 내뿜어 싱그럽기까지! 뿌리지도 않은 보리지의 싹이 올라오자 돌려받지 못한 적금의 아쉬움이 눈 녹듯 사라진다.
며칠 전부터 죽은 줄 알고 낙담했는데 아스파라거스가 쏙 올라오기 시작했고, 작년 한땀 한땀 모아 틀밭으로 옮긴 달래는 1년 사이에 후손을 많이 남겼다. 밭으로 놀러 온 친구에게 호미 하나 던져주며 양껏 따가라고 인심을 썼다. 역시 친구에게 한턱 쏘는 게 적금 만기의 커다란 기쁨이지. 언덕에 머위를 심고, 절화로 쓸 수 있는 클로버 씨앗을 뿌려볼까? 봄에 맞는 달콤한 적금 만기를 조금 더 누려보고 싶다.
글·사진 이아롬 프리랜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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