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남 밀양으로 귀농했을 때다. 두 번째 해 우리가 직접 벼농사를 지었다. 첫 번째 해에 벼농사를 배우긴 했지만, 부족했다. 벼농사에서 가장 중요한 게 논바닥을 평탄하게 맞추고 물을 채워놓는 것이다. 연이은 가뭄에 물을 제대로 대질 못했다. 설상가상으로 논 가는 기계가 고장 났다. 이게 논인지 피밭인지 모를 정도로 많은 피가 올라왔다. 수백 번 써레질로 흙을 뒤집고 열심히 피를 잡았지만, 끝이 보이질 않았다. 벼를 수확할 때쯤 새로 곡성에 구한 감밭의 수확 시기와 생강 수확 시기가 겹쳤다. 기계도 아니고 낫으로 벼를 다 베느라고 짝꿍과 나는 녹초가 되도록 일했다. 이렇게 한번 데고 나니 다시는 벼농사하고 싶지 않았다. 곡성에 와서는 웬만하면 벼농사는 하지 말자 다짐했다.
인간은 망각의 동물이라 했던가. 실수를 반복하고 또 반복하는 것이 인간이다. 봄이 오니 벼를 심고 싶다는 마음이 살랑살랑 솟구쳤다. 알록달록 이삭이 팬 아름다운 토종벼 논이 눈앞에 아른거린다. 맛있는 쌀을 자급할 수 있다. 도정 뒤 나오는 왕겨는 생태 화장실에 필수적이고, 닭장에 넣어 뽀송뽀송하게 거름을 만들 수 있다. 쌀겨는 닭의 밥으로 최고다. 밭의 멀칭(땅을 덮는 재료)으로 볏짚만 한 게 없다. 뭐 하나 버리는 게 없다. ‘벼농사만 한 게 없지 그럼!’ 하며 다시 합리화한다. 시간은 없고 체력이 부족하니 기계를 쓰자.
옆집 할머니가 몇 년 묵은 논이 있다고 소개해줬다. 물이 좋아 쌀이 아주 맛있는 좋은 논이라고 했다. 논은 온갖 잡초로 덤불져 있었다. 논둑은 무너져 있었다. 이번 주에 로터리를 치기(파종할 수 있도록 밭을 가는 일)로 했는데 과연 그 전까지 정리가 가능할까. 단체 일 하랴 밭일하랴 바쁜 와중에 시간을 내어 예초 작업을 했다. 풀을 베어내니 그 논의 실태가 드러났다. 논 한가운데 구멍이 나 있기도 하고 논둑이 낮아 더 높이 세워야 할 것 같았다. 사흘 정도 작업했는데 진척이 보이질 않았다.
로터리 치기 하루 전, 로터리를 치겠다는 분이 갑자기 자신은 아직 초보라 그곳은 치지 못하겠다며 거절했다. 큰일이다. 다른 분을 빨리 구해야 한다. 수소문 끝에 어려워하던 마을 한 분이 끝내 수락해줬다. 로터리 치는 당일, 마을회관에서 점심을 먹었다. 우리 마을은 마을 분들이 회관에 모여 함께 점심을 먹는 문화가 있다. 마을 분들 모두가 그 논에 대해 수군대고 있었다.
“그 논은 갈다가 트랙터라도 빠지면 배보다 배꼽이 더 커.” “아이고 그 논을 뭣 하려 한대. 생고생이여, 생고생.” 우리보다 더 우리 논을 걱정했다. 보다 못한 어르신들은 점심을 먹고 부리나케 논으로 이동했다. 뒤늦게 따라가니 어른들이 손사래를 쳤다. “논이 없는 것도 아니고, 이런 곳에서 고생시럽게 허지 말어.” 논을 다시 구하긴 이미 너무 늦었다. 토종벼 북흑조와 붉은차나락으로 모판을 만들어놨는데 아깝지만 버리거나 팔 수밖에 없다.
며칠 뒤 지인에게 연락이 왔다. 자신의 논 한 필을 빌려주겠다는 것이다. 집에서 300m 거리도 안 되는 논이다. 우리 소식을 듣고 안타까워하다가 자신의 논을 빌려주겠다고 다짐하게 됐단다. 다른 이웃분도 내년에 자신의 논을 쓰라고 이야기하신다. 어떻게 이럴 수 있을까. 농사지으면 자기 돈이고 자산인데. 그들은 아낌없이 자신의 것을 내놓았다. 지금이야 우리가 가진 것이 없어 드릴 게 없지만, 이 은혜는 또다시 우리 같은 사람들에게 갚으리라. 우리 걱정을 자기 걱정처럼 해주는 이웃들이 있어 농사할 맛 난다. 신명 난다.
글·사진 박기완 토종씨드림 활동가
*농사꾼들: 농사를 크게 작게 지으면서 생기는 일을 들려주는 칼럼입니다. 지역이 다른 네 명의 필자가 돌아가며 매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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