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머리칼을 빗어 넘기며 손으로 쥐어보았다. 사춘기 적보다 적게 잡히는 가늘고 힘없는 머리카락에서 곧 다가올 40년의 궤적을 본다. 이미 오래전 세는 의미가 사라진 하얗게 센 머리가 뻣뻣하게 섞여 있다. 흰머리 아래 드러난 건조한 피부 위 자잘한 주름과 늘어진 모공이 눈을 마주친다. 거울에 비친 늙은 사람이 이목구비를 흉내 내고 있다.
나는 벌써부터 키오스크 앞에서 머뭇거린다. 기계마다 조금씩 다른 버튼과 카드 투입구가 한눈에 빨리빨리 파악되지 않기도 하지만, 동물성을 전혀 먹지 않는 비건을 실천하다보니 달걀이나 어묵 따위를 빼고 만들어달라고 요청할 방법이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사람이 주문을 받는 식당이 줄어들다 못해 사라질까 두렵다. 효율과 비용이라는 명분 아래 사람과 사람 사이를 기계가 채운다. 기계 없인 서로를 만나지 못하게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드는 순간 이미 그렇다는 걸 깨달았다. 휴대전화 메시지나 전자우편 없이 어떻게 약속을 잡았더라?
지난해 9월, ‘우리 동네’라는 개념이 사라지는 추세를 거스르며 20년 지기와 ‘동네 친구’가 되었다. 친구가 멀리서 이사를 와줬다. 반찬을 많이 만든 김에, 밥을 지은 김에 쓱 불러서 숟가락 하나 더 얹으면 되는 부담 없는 거리. 서로의 집까지 10분이면 간다.
저녁 식사를 준비할 겸 설날에 먹으면 좋을 채식 레시피를 개발한다는 명분으로 부침개를 7장이나 부쳤다. 명절 나물이 버려지지 않도록 활용하면 좋을 것 같아 대표적으로 많이 쓰는 콩나물과 시금치, 고사리를 반죽에 섞어 삼색으로 구웠다.
고사리전 만들기는 손질된 고사리만 있다면 아주 쉽다. 데친 고사리를 2~3㎝ 길이로 쫑쫑 썰어 부침개 반죽에 넣어 굽는다. 진간장에 현미식초를 섞어 노릇한 고사리전을 콕 찍어 먹는다. 한 입 베어물자마자 친구와 나는 막걸리가 생각났다.
막걸리 한 병으로 새벽 3시까지 수다를 떨었다. 안주로 차린 고사리전은 특유의 향과 질깃한 식감이 있어서 입에 맞지 않을까 염려했는데 다행히 맛있게 먹어줬다. 질긴 듯한 식감을 좋아한다고 했다. 20년이나 알고 지냈으면서도 친구가 살짝 억센 듯한 줄기를 즐긴다는 사실을 몰랐다. 나와 다른 입맛을 만나 반가웠고 다름이 반가워서 안심했다.
비건을 하면서 이 친구 생각이 자주 났다. 꽤 마른 편인 그녀는 음식을 깨작거린다는 핀잔을 자주 들었다. 소고기와 닭고기는 맛없어서 먹지 않는 편이고 간이 센 음식보다 담백한 맛을 좋아한다. 우유가 몸에 맞지 않아 나보다 오래전부터 식물성 드링크를 먹었다. 먹는 걸로 참견하는 경우가 많은 한국에서 비주류 입맛으로 산다는 게 무엇을 뜻하는지, 이제야 친구의 삶을 이해한다.
50㎏짜리 몸뚱이를 가진 작은 인간 하나가 그보다 가벼운 다른 인간의 입맛 하나를 이해하는 데 900번이 넘는 식사와 6천 일에 가까운 낮과 밤이 필요했다. 세상이 아무리 빨라져도 나는 이렇게 느리고 더욱 느려질 것이다.
2025년이면 고령인구 비율이 20%를 넘겨 초고령사회에 진입한다고 한다. 오래된 사람이 늘어나면 멀미 나게 빠른 사회가 조금은 느려질 수 있을까. 스크린이 아닌 얼굴을 마주 보며 먹는 끼니가 다시 회복될 수 있을까.
글·그림 초식마녀
*비건 유튜버 초식마녀가 ‘남을 살리는 밥상으로 나를 살리는 이야기’를 그림과 함께 4주마다 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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