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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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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까치 가족 위해 에어컨은 쉽니다

선풍기 틀어놓고 즐기는 시원한 곤약무침
등록 2024-07-19 22:48 수정 2024-07-24 20:10
일러스트레이션 초식마녀

일러스트레이션 초식마녀


봄에 산 곤약의 유통기한이 끝나간다. 흔하지만 독특한 식재료인 곤약, 뿌옇고 탄력 있는 덩어리를 잘라 무알코올 맥주에 곁들일 술안주를 만든다.

‘칼로리가 낮으니 밤에 먹어도 괜찮지.’

비와 계절로 끈적한 밤, 더운 공기를 씻어줄 시원한 맛을 조립한다.

이번 여름 아직 에어컨을 한 번도 틀지 않았다. 나 혼자 시원하자고 지구에 더운 바람 뿜기 찝찝해서 웬만하면 안 틀고 지내는 편이다. 손님이 방문하면 간간이 에어컨에 일감을 주곤 했는데 지금은 선풍기만 바쁘게 돌아간다.

에어컨이 임시휴업을 선언한 데는 기후위기보다 더 직접적인 명분이 있다. 실외기 뒤에 생긴 둥지가 생명을 여럿 껴안고 있기 때문이다. 검은 점박이 무늬에 푸른기가 도는 회색 알들이 마치 실외기가 낳은 것처럼 빽빽하게 모여 있다. 작은 알들을 지키는 둥지는 빳빳한 나뭇가지와 부드러운 이끼로 지어졌다. 설계부터 시공까지 솜씨가 보통이 아니다. 하룻밤 만에 완공된 이 집의 주인은 신비로운 푸른빛 꼬리를 가진 물까치들이다.

얼마 전부터 두 마리가 자주 보였다. 툭하면 베란다 난간에 앉아 있길래 동물을 먹지 않는 사람 집을 알아봤을지도 모른다는 즐거운 상상을 하며 내심 뿌듯해했다. 하지만 그들은 어슬렁거리는 인간 동물을 경계하며 집을 지었을 뿐이다. 한 쌍의 물까치가 7개 넘는 알을 낳았다.(가까이 가면 비명을 지르며 도망가기 때문에 멀리서 눈대중으로 확인한 개수다.) 멋대로 침입해놓고 눈치까지 주는 물까치 부부가 무사히 양육을 마칠 때까지 우리 집 에어컨은 쉽니다!

차가운 맥주, 매콤새콤한 곤약 무침이면 더위도 즐길 만하다. 곤약을 얇게 썰어 양 끝을 남긴 중앙에 길게 칼집을 낸다. 칼집 안으로 끝부분을 말아 넣어 꽈배기 모양으로 만든다. 끓는 물에 식초 한 스푼을 넣고 곤약을 1분 정도 데친다. 오이와 적양파를 착착, 먹기 좋은 크기로 채 썬다. 간장, 식초, 고춧가루, 약간의 설탕과 참기름을 섞어 양념을 만든다. 통깨도 뿌려준다. 손질한 채소, 데친 곤약과 양념을 광나는 스테인리스 그릇에 털어넣고 조물조물 무친다. 손으로 무쳐야 맛이 난다고 여기는 사람이라 깨끗하게 씻은 맨손을 사용한다. ‘공장에서 나온 일회용 플라스틱이 정말로, 박박 씻은 손보다 더 깨끗할까?’라는 의심도 있다. 손님에게 낼 음식에는 주걱이나 젓가락을 사용하니 초대됐던 이들은 안심하시라….

잔뜩 만든 곤약무침 절반은 냉장고에 보관한다. 다음날이면 좀더 빨갛고 좀더 쫀득거리는 곤약무침을 먹을 수 있다. 하루라는 시간이 곤약에 쫀쫀하게 스며들어 맛을 더한다. ‘숙성’이라는 이름의 ‘시간 맛’을 즐기기 위해 부러 한 끼에 먹을 양보다 많이 무친다.

둥지를 발견하고 보름이 지나자 조약돌 같던 알이 동물로 바뀌었다. 너무나 작고 너무나 빨간 동물이다. 기척이 들렸는지 큰 부리를 벌리기 시작한다. 갓 부화한 새는 조금 징그럽구나. 내 눈에 예뻐 보이지 않아도 살아 있는 존재는 귀하다. 물까치 부부에게 스트레스를 줄까봐 화초들이 목말라 보일 때 말고는 베란다 쪽으로 가지 않고 있다. 우리 집 실외기가 이들의 고향이다. 명절이라고 안부 전하러 오지 않아도 좋으니 모두 무사히 자라 떠나기를….

초식마녀 비건 유튜버

*비건 유튜버 초식마녀가 ‘남을 살리는 밥상으로 나를 살리는 이야기’를 그림과 함께 4주마다 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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