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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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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솔로’ 빌런, 남 일 같을 땐 웃었지

소수인 채식주의자 ‘불편 끼치는 존재’로 묘사한 방송
등록 2025-02-07 20:56 수정 2025-02-13 16:04


10년 넘게 티브이(TV) 없이 살아왔다. 생방송을 볼 수 없기에 실제 방영일보다 하루 늦은 목요일 저녁마다 푸짐한 음식을 차려놓고 ‘나는 솔로’ 프로그램을 챙겨 본다. 피 흘리지 않은 재료로 만든 채식 요리를 먹으며 짝을 찾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사람들을 구경하는 이 시간은 한 주의 작은 즐거움이다. 몇몇 출연자의 눈살 찌푸려지는 발언이나 행동도 심심한 실제 일상에선 보기 어려운 구경거리라 그들의 행위가 괴이할수록, ‘빌런’이라 불리는 출연자가 많을수록 시청률이 높아진다. 나 역시 불량식품 맛을 즐겼다. 그저 남 일이라고 여겨질 때까지는.

채식주의자 출연자가 나오면서 꽤 오래 반복해온 목요일의 즐거움을 내려놓게 되었다. 그는 나 같은 비건보다 사정이 좀 나은(?) 페스코 베지테리언이었음에도 먼발치에서 여유로운 척하던 나를 구경꾼 자리에서 끌어내렸다. 방송은 채식주의자와 비채식주의자가 어떻게 맞춰갈지에 집중하기보다는 소수인 채식주의자가 결국 얼마나 불편을 끼치는 존재인지 드러내기 바빴다. 관계가 좋아지는 방법은 얼마든지 있지만 창의력 빈곤으로 뻔한 갈등에 빠지게 했다.

관계를 맺고 방송을 만들고 글을 짓는 모든 행위가 요리와 비슷하다. 낯선 사람보다 익숙한 사람을 선호하고 낯선 재료보다 익숙한 재료를 맛있게 느낀다. 그렇다고 늘 만나던 사람만 만나고 먹던 요리만 먹으면 질리는 게 인간이다. 그럴 때 필요한 건 익숙한 것을 낯설게 조합하는 창의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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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건 7년차에도 집밥이 질리지 않는 이유는 조금씩 새로움을 더하기 때문이다. 데친 무시래기를 넣은 파스타를 만들 땐, 당연히 들어갈 거라 여겨지는 재료인 올리브유를 넣지 않는다. 간장과 들기름으로 간을 맞추고 마지막에 들깻가루를 뿌린다. 고소한 맛이 나는 스파게티를 돌돌 말아 구운 김에 싸 먹는다. 김에 싸 먹는 올리브유 없는 파스타. 사소하지만 재밌는 변주다.

나처럼 느껴지는 출연자가 ‘빌런’이 된 것도 싫었지만 결국 시청을 포기하게 만든 결정적인 계기는 한 연예인 패널이 세미 베지테리언인 출연자를 반복해서 ‘비건’이라고 부르는 일이었다. 엄연히 다른 용어인데, 정정하는 자막도 없는 장면을 몇 번이나 보여주는 건지…. 버젓이 틀린 정보를 방영하는 허술함, 안일함, 막강한 권력을 가진 미디어의 무책임함을 보니 지금 한국 사회의 혼란은 불가항력이다. 맡은 일을 ‘제대로’ 하지 않아도 처벌이 없다.

초식마녀 비건 유튜버

*비건 유튜버 초식마녀가 ‘남을 살리는 밥상으로 나를 살리는 이야기’를 그림과 함께 4주마다 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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