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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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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린 월세 입금해주세요’ 어떻게 버무려야 생채기 덜 낼까

카레 속 당근도 올리브유·커민 버무려 내니 전혀 다른 맛
등록 2024-12-08 16:06 수정 2024-12-14 17:19


‘밀린 월세 입금해주세요.’

어떻게 말해도 불편한 감정을 유발할 이 말을 어떻게 하면 덜 기분 나쁘게 할 수 있을까. 임차인의 두 번째 월세 미납을 두고 고민에 빠졌다.

2022년, 전국적인 부동산 하락을 앞두고 전 재산을 털어 인천에 작은 연립주택을 하나 샀다. 기가 막히게 최고점에 딱 들어가는 재주 덕분에 자산의 절반을 잃고 무주택자라는 딱지만 겨우 뗐다. 전세사기로 시끄러웠던 때라 괜한 오해나 감정노동이 싫어서 월세로 세입자를 구했는데 이번 월세는 많이 늦어질 것 같다는 문자를 받았다. 약속한 날짜가 지났지만 입금은 되지 않았다.

“안녕하세요? 임대인입니다.”

챗지피티(chatGPT)가 나보다 인간적일 것이다. 돈이 얽힌 일엔 건조한 태도가 최고라고 믿는 나는 인공지능(AI) 로봇처럼(이라는 말은 이제 틀렸다. ‘AI 로봇보다 못한’이 정확하다) 항상 똑같은 문구로 소통을 시작한다.

“요즘 경기도 어렵고 사정이 있으시겠지만 저도 매달 대출금을 갚아야 하는 상황이라 마냥 이해해드리긴 어렵습니다. 가급적 이번 주말까지 입금 부탁드립니다.”

노동자의 입장에서 밀린 월급을 독촉할 때는 거리낌이 없다 못해 살짝 아드레날린이 도는 느낌이 들었는데 ‘집주인’이 되어 월세 독촉을 하려니 어쩐지 갑질하는 악당이 된 것처럼 느껴진다. 답장은 오지 않았다.

월세가 처음 밀린 2024년 10월부터 조금 울적했다. 월세를 미루는 삶에 대해 구체적으로 상상하게 됐기 때문이다. 월세를 내지 못할 정도로 돈이 부족한 삶, 혹은 돈이 있지만 월세쯤은 미뤄도 된다고 생각하는 삶. 전자는 비참하고 후자는 비열하다. 어느 쪽이든 마음을 우울하게 만들었다. 상황이 이렇다보니 무리해서 일을 받다가 이웃 친구들에게 신세를 졌다. 11월에는 집을 비우고 다른 지역으로 가는 날이 유독 많았는데 친구들은 기꺼이 나의 빈집을 살펴주었다.

깨끗한 바람이 부는 토요일 오후, 점심을 대접하겠다며 친구들을 모았다. 이태원에서 맛있게 먹었던 모로코식 당근샐러드를 만들기 위해 진한 오렌지빛이 도는 당근을 두 개 사서 푹 삶았다. 1㎝ 두께로 동그랗게 자른 당근이 부드럽게 익으면 체로 건져 찬물에 헹군다. 스텐볼에 담고 올리브유와 커민, 소금, 레몬즙, 파프리카 파우더를 넉넉하게 넣고 조물조물 고르게 버무린다. 상추와 치커리를 잘게 잘라 곁들이고 돌절구에 캐슈너트를 으깨 양껏 뿌린다. 말린 자두는 2~3등분해서 당근 사이사이에 올려준다. 이국적인 향이 나는 당근샐러드를 새콤한 토마토 파스타와 함께 곁들여 낸다.

긴장이 아니 될 수 없다. 기껏 초대해놓고 당근이라니. 가지, 버섯, 당근… 호불호 삼대장 아닌가. 그중 국민음식 카레를 통해 많은 이에게 상처를 안겨준 삶은 당근을 주인공으로 식탁을 차렸다. 용감하게 차려놓고 소심하게 친구들의 반응을 살핀다.

“와, 나 카레에 들어간 삶은 당근을 안 좋아하거든. 근데 이건 너무 맛있다.”

정확히 원했던 반응이다. 그치. 사실 삶은 당근이 문제가 아닌 거지. 같아 보이는 삶은 당근도 재료 조합에 따라 완전히 다른 맛을 낸다. 고소한 올리브유와 짜릿한 커민에 버무린 당근은 달큰하고 부드러운 감칠맛이 돈다. 친구들은 이 맛을 알아주었다.

‘밀린 월세 입금해주세요.’

이제 내 말을 요리할 차례다. 모두가 싫어할 것 같은 삶은 당근 같은 말을, 어떻게 버무려내야 서로의 마음에 생채기를 내지 않을 수 있을까.

초식마녀 비건 유튜버

 

*비건 유튜버 초식마녀가 ‘남을 살리는 밥상으로 나를 살리는 이야기’를 그림과 함께 4주마다 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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