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처음 보는 하늘이었다. 황토색 구름 뒤로 시뻘겋게 빛나는 태양이 붉은 신호등처럼 매달려 있었다. 지붕을 덮을 것처럼 낮게 흐르는 누런 구름의 틈 사이로 맑은 하늘이 비치는 기묘한 풍경이었다. 미세먼지와는 달랐다. 설마 여기까지 날아온 걸까.
두껍게 하늘을 가로지르는 저것은 구름이 아니었다. 타오르는 숲이었다. 잿더미가 된 생명이었다. 경남 산청에서 시작된 산불이 진주까지 번져오던 날이었다. 진주 수곡면까지 뻗어온 불은 두어 시간 만에 가까스로 잡혔지만, 산청의 불길은 며칠을 더 삼키고서야 겨우 진화됐다.
산청은 내가 사랑하는 지역 중 하나다. 진주에서 출발하는 서울행 고속버스를 타면 꼭 보게 되는 아름다운 경치가 있는데 지도앱을 켜고 위치를 확인하면 십중팔구 산청이었다. 이름처럼 푸르고 청명한 산세가 시선을 붙잡는 곳. 연고가 없어도 사랑할 수밖에 없는 이곳이 더는 훼손되지 않길 바라며 비를 기다렸다. 얄궂게도 오래오래 지켜졌으면 하는 존재들이 더 빠르게 소멸해버리는 것 같다.
남해에서 최고로 맛있는 커리를 팔았던 오를라섬이라는 식당도 그렇다. 수도권에 살던 젊은 청년들이 이주해 만든 이 근사한 식당은 얼마 전 문을 닫았다. 1년 전 겨울, 우연히 다큐멘터리에 소개된 오를라섬을 보고 비건 시금치 커리를 배우러 갔다. 오래오래 운영해주길 바랐던 이곳이 영업을 종료하면서 구불구불한 남해 도로를 달려 배워온 레시피만 남았다.
2주마다 배송되는 못난이 농산물 상자 속에 시금치 한 묶음이 도착했다. ‘못난이’라는 이름이 무색할 만큼 저마다 개성과 아름다움을 지닌 채소들이지만, 시장의 기준에 맞지 않는다는 이유로 그렇게 불린다. 마침 손질하기 좋은 크기의 아담한 시금치를 받은 김에 사라진 식당의 커리를 한 솥 끓이고 싶다. 믹서기 통에 오트밀크 한 컵과 캐슈너트 한 컵을 넣는다. 소금 한 꼬집 뿌리고 손질한 시금치를 넣어 곱게 갈아준다. 뜨겁게 달군 스테인리스 팬에 기름을 두르고 다진 양파를 볶는다. 천천히 오래 볶아야 갈색으로 변한 양파에서 단맛과 감칠맛이 우러나온다. 양파가 윤기 나는 갈색으로 변하면 믹서기에 간 시금치 소스를 쏟아 푹 끓인다. 방울토마토는 꼭지만 떼서 통째로 굽는다. 고슬고슬한 밥 위에 카키색의 시금치 커리를 가득 붓는다. 마지막으로 구운 방울토마토를 취향대로 올린다. 부드러운 초록 위 새콤한 빨강의 맛. 기분 좋은 단맛과 고소함이 가득 올라오는 시금치 커리. 잊고 싶지 않은 맛이다. 잃고 싶지 않은 맛이다.
우리는 이번 산불로 사람까지 잃었다. 노동을 대체하는 기술은 쫓아가기 버거울 정도로 쏟아지지만, 생명을 구하는 기술은 더디고 부족하다. 불길 속으로 뛰어드는 건 여전히 사람이다. 작은 촛불에도 상처받는 연약한 피부를 입은 채로.
지구 위 모든 생명체가 피할 수 없는 거대한 운명을 향해 가고 있다. 이미 2024년에 파리협약이 마지노선으로 삼았던 1.5도 상승을 넘어섰다. 매일 불행한 뉴스를 들으면서도 왜 자신이 겪기 전까진 남의 일로만 여겨질까. 지독한 무심함 사이로 이르게 피어오르는 꽃봉오리들이 불길한 미래를 예고한다.
글·그림 초식마녀 비건 유튜버
*비건 유튜버 초식마녀가 ‘남을 살리는 밥상으로 나를 살리는 이야기’를 그림과 함께 4주마다 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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