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렴풋한 때 아버지 차 뒷좌석에서 먼발치의 핵발전소 돔을 본 일이 몇 차례 있다. 거대한 반구형 시멘트 덩어리가 나란한 모습이 꽤 인상적인, 비교적 또렷한 시각 기억이다. 가족은 내가 초등학교 4학년이던 1987년부터 4년 가까이 경남 창원에서 살았고 어머니 본가가 경북 경주였다. 고리핵발전소나 월성핵발전소였을 것이다.
어린 시절 기억엔 또 이런 게 있다. 산길을 운전하던 친척 어른이 차를 멈춰 불을 껐다. 다 함께 차에서 내렸는데 손가락이 보이지 않는 암흑이었다. 빛이라곤 하늘의 별뿐. 누굴 기다린 건지 한동안 시간을 보냈는데 그게 경주 토함산 산중이었다. 지금의 한국수력원자력 본사 인근 어디쯤이었다. 인공조명이 사라진 옥외의 칠흑 같은 어둠을 그때 처음 경험했다. ‘전기의 소중함’을 주제로 한 수업이나 공익광고를 접할 때면 그때를 자주 떠올렸다.
좀 이상한 말이지만 우리는 온전한 전기 공동체다. 유럽 등은 국가 간 전기를 수출입 하지만 한국은 타국과 그리드(전력망)가 끊겨 있다. 생산과 소비가 이 국가 내에서만 이뤄진다. 무심히 전기를 쓰는 다수도, 생산과 송배전이 동반하는 고통과 불이익을 감내하는 이도 모두 우리 공동체 구성원이다. 공동체의 윤리는 고통과 불이익을 덜거나 나누는 것이다.
우리 가족은 지금 사는 곳에 대한 만족도가 매우 높다. 아이가 스스로 독립할 때까지 살려 하지만 아쉬운 점은 인근에 수도권순환도로가 지나고 폐기물을 태우는 열병합발전소가 있다는 것이다. 간혹 도로의 자동차 소음과 소각장 연기가 내 아이의 건강에 영향을 주지 않을까 걱정한다. 아마도 우리 가족이 그 인과관계를 명확히 보여주는 어떤 경험을 한다면, 더는 마음 편히 하루하루를 보낼 수 없을 것이라 확신한다.
제1481호 표지이야기 ‘월성에 갇힌 사람들’ 취재 과정에 만난 월성핵발전소 최인접 주민들이 그렇게 지내고 있었다. 다섯 살 손주의 몸에서 삼중수소가 나오고, 가족과 이웃이 암에 걸려 죽거나 고통받았다. 인구 600명 규모의 작은 마을 나아리 안에서도 집이 핵발전소와 가까울수록 그런 경향이 확연했다. 그런 이들에게 삼중수소가 아무리 기준치 이하라 한들 안심할 리가 없다. 우리 모두 후쿠시마 오염수 때문에 당장 수산물 소비를 꺼리지 않는가.
이 땅의 핵발전 역사는 내가 나고 자란 시간보다 길다. 핵발전으로 생산한 전력은 국내 발전량의 3분의 1(2022년 29.6%)에 이른다. 어떻게든 줄여가야 한다 생각하지만, 윤석열 정부는 크게 늘리려 한다. 그렇다면 이런 문제를 어찌 풀어야 할지에 대한 답도 갖고 있어야 하지 않나. 그게 전기로 연결된 공동체, 공화국의 시민이자 정부가 갖춰야 할 기본적 태도이며 덕성이 아닐까. 우리 안의 후쿠시마를, 우린 자주 잊는 것 같다.
박기용 기자 xeno@hani.co.kr
*21 토크ㅡ지난호 <한겨레21> 표지 기사의 뒷이야기를 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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