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바로가기

한겨레21

기사 공유 및 설정

답례하겠다니 들은 말 “원래 나한텐 안 돌아와, 나중에 다른 사람한테 갚게 돼 있어”

일러스트작가와 와인농장 간 품앗이… 농사짓고 싶은 건, 어쩌면 조건 없이 사랑하는 농사꾼을 닮고 싶어서
등록 2023-07-21 21:08 수정 2023-07-25 13:00
이아롬 기자(가운데)가 이파람 작가와 함께 완성한 봉분 모양 키홀가든.

이아롬 기자(가운데)가 이파람 작가와 함께 완성한 봉분 모양 키홀가든.

경기도 양평에서 농사지으며 일러스트 작업을 하는 이파람 작가에게 로고 디자인을 의뢰했다. 원하는 디자인과 예산을 이야기했더니 “돈이 아닌 다른 교환이었으면 좋겠다”는 답이 돌아왔다. 나는 파람에게 답례로 당장 필요한 것을 내줄 수 없어 고민했지만 그는 다음에 달라며 미소 지었다. 호시탐탐 답례할 기회를 노리다 올봄에야 지난해에 만든 퇴비사(두엄간)가 무너졌다는 소식을 듣고 기뻐했다.(?!) 드디어 크게 도울 기회를 찾았으니까.

파람은 반려고양이의 배설물을 쌓아둔 퇴비사를 정비하면서 주변에 흙을 쌓아 키홀가든(열쇠 구멍 모양으로 퇴비화를 하며 가드닝을 할 수 있는 디자인의 화단)으로 완성하고 싶어 했다. 돌이나 나무를 엮어 틀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봉분처럼 큰 두둑을 만들기 원했는데, 갈대를 베어 두껍게 쌓아 흙과 버섯 배지로 층을 올린 뒤 다시 흙을 쌓아 마무리하는 작업이었다.

느리고 섬세하게 작업하는 파람과 디테일은 없어도 속도가 빠른 나는 제법 좋은 파트너였다. 나라면 마지막에 흙만 쌓아 올렸을 텐데 파람은 삽을 뉘어 풀까지 떠서 옮겨 심어주는 방식을 주문했다. 아, 그렇다면 틀 없이 쌓아 올린 두둑에 풀뿌리가 엉겨 형태를 더욱 단단하게 지탱해주겠구나! 풀을 어떻게든 살리고 활용해보려는 파람의 생각은 흥미로웠고, 함께 몸을 쓰며 우리는 좀더 친해진 기분이 들었다.

얼마 전에는 소설가이자 충북 충주에서 ‘레돔’이라는 내추럴 와인을 만들고 포도농사를 짓는 신이현 작가가 주류박람회에 온다기에, 그를 보고 싶은 마음에 인사하러 들르겠다고 연락했다. 그러자 “사실은 일손이 부족하다”며 난색을 보였다. 아, 다행이다. 나는 그에게도 빚이 있다.

때는 3년 전, 코로나19라는 역병에 모두가 우왕좌왕했을 때 친환경 제품을 포장 없이 판매하는 ‘제로웨이스트숍’을 기획하게 됐다. 가뜩이나 생소하고 낯선 가게를 실험하는데 사회적 거리두기 단계가 심화하면서 나는 매일 좌절했다. 손님이 한 명도 오지 않는 날이 있었고, 대부분은 손님 수를 손가락으로 셀 수 있는 날이었다. 잘하고 싶은 마음에 몸과 마음을 갈아넣고 만신창이가 된 어느 날, 집으로 와인 몇 병이 배달됐다. “제로웨이스트숍은 프랑스에서도 10% 정도만 가는데 이런 걸 시도한다니 응원한다”는 엽서와 함께.

그 역시 평소 쓰레기 타령을 지독하게 하는 사람 중 하나였다. 마시고 난 와인병을 씻어서 다시 가져오기를 바란다는 양조장 주인이었고, 와인을 쇼핑백 대신 신문지에 둘둘 말아 갖고 가는 게 어떻겠느냐는 사장이었다. 그런 그의 응원은 정말 고마웠고 한편으로 나를 부끄럽게 했다. 나는 살면서 누군가에게 이렇게 조건 없는 지지를 보내본 적이 있었나. 이제는 내가 마음껏 그를 응원할 차례다. 그가 팔지 못한 와인을 무겁게 충주로 들고 가지 않도록 열심히 와인을 팔았다.

농사가 좋으면서도 나는 늘 궁금했다. 농민의 이야기만 잘 들어도 충분한 일일 텐데 나는 왜 이렇게까지 농사를 짓고 싶어 할까? 사실은 이 사람들을 닮고 싶기 때문이 아닐까. 그들처럼 넉넉해지고 싶어서, 조건 없이 누군가를 사랑해주고 싶어서. 맛있는 구억배추 김치를 보내준 충남 부여의 신지연 농민은 답례하고 싶다는 내게 이렇게 말했다. “원래 나한텐 안 돌아와, 나중에 다른 사람한테 갚게 돼 있어.” 농민들의 이런 말과 태도가 오늘도 나를 단단하게 붙잡는다.

​ 글·사진 이아롬 프리랜서 기자

*농사꾼들: 농사를 크게 작게 지으면서 생기는 일을 들려주는 칼럼입니다. 지역이 다른 네 명의 필자가 돌아가며 매주 연재.

한겨레는 타협하지 않겠습니다
진실을 응원해 주세요
맨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