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사를 짓고부터 일상에서 쓰는 말 가운데 농업에서 유래한 게 많음을 새삼 느낀다. 생각 없이 쓰던 말들이 체험해서 그런가, 그 뜻 또한 새록새록 하다. 그중에 가슴 뛰는 말은 문전옥답(門前沃畓). 집 앞의 비옥한 논이라니. 귀한 재산을 비유하는 말로 쓰이지만 내겐 문자 그대로 설레는 말이다. 문 열고 나가 곧장 흙을 밟고 기름진 땅에 심은 작물을 돌보는 건 얼마나 기쁜 일일까.
집은 아니지만 농막 앞에 문전옥답을 만들기로 했다. 물론 농막 문을 열면 바로 앞이 밭이긴 하다. 비옥하지 않을 뿐. 여기저기서 보고 들은바 틀밭이 토양과 배수 관리에 편리하다고 한다. 경계를 두르고 흙을 채워, 말하자면 화단을 만들어 작물을 가꾸는 방법이다. 구획을 딱딱 지어 덩굴채소, 열매채소, 잎채소 등등 분류해서 심어놓으면 예쁘기도 하다. 경계를 만들 재료는 ‘보로꾸’라고 불렀던 시멘트 블록으로 골랐다. 나무로 하면 예쁘긴 한데, 내구성이 떨어지고 가격도 비싸다. 없는 게 없는 진부 철물점에서 한 팔레트를 주문했다. 배달료를 포함해 장당 1700원. 100장을 배달받았다.
트럭에서 블록을 내려 낑낑거리며 쌓아놓고 나니 동네 할머니 두 분이 마실을 오셨다. 커피와 과일을 내드리고 남편과 둘이 블록 배열을 시작했다. “이게 뭐나?” 할머니 한 분이 물어 구구절절 설명하니, “그냥 비니루 덮고 하면 되지, 지지하게 돈 들이고 뭐 하나” 하신다. 다른 할머니가 “해보는 거지 뭐, 재미로. 허허 내비둬유” 하신다. 갤러리들의 관심을 받으며 39㎝ 길이의 블록 2장을 머리로 삼고 양쪽 세로 방향으로 9장씩 쌓았다. 대략 0.7평의 틀밭 네 개를 만들고 나니 해가 저물었다. 어둑한 밭에 놓인 시멘트 블록 틀 4개. 아, 이건 흡사… 관짝? 메멘토 모리. 죽음을 기억하며 오늘을 즐겁게 보내라는 뜻인가.
2주 전 주말, 옥수수를 심었다. 지난 주말, 옥수수 싹과 함께 풀이 얼마나 올라왔을지 걱정하며 밭에 갔다. 밭은 예상대로 풀로 가득했다. 가까이 가서 보니 풀 더미가 왠지 옥수수같이 생겼다. 잡초 중에 옥수수처럼 뾰족한 잎을 하고 옥수수인 척하는 풀이 있긴 한데, 봐도 봐도 옥수수랑 너무 비슷했다. 이거 혹시? 작년에 덜 거둔 옥수수에서 싹이 난 건가? 땅을 파헤쳐보니 역시, 옥수수통에 붙은 옥수수알이 모두 싹을 틔웠다. 그런 게 밭에 천지다. 강하다, 옥수수. 모종처럼 옮겨 심어볼까 했더니 아랫집 아주머니가 그래봐야 못 산단다. 그 자리에서 자라게 둬도 옥수수알이 온전하게 맺지 않는다고 한다. 온종일 옥수수를 뽑았다. 올해는 제대로 거두자. 이렇게 하나 배운다.
지난해 아버지가 주신 용돈으로 사다 심은 목단이 한 해 꽃을 피우고는 죽어버렸다. 농원에 가서 물으니 물이 많은 곳에 심으면 못 산다고 한다. 정 심고 싶으면 흙을 높이 돋워서 심으란다. 5주를 새로 사다가 흙동산을 만들어 앞에 3주 뒤에 2주, 걸그룹 대형으로 심었다. 막 꽃망울이 맺힌 걸 심어두고 2주 만에 갔더니 꽃잎이 지고 있었다. 학창 시절에 배웠던 “어여쁜 장미야, 참 아름답다. 거친 언덕 길가 외로운 숲속에 그 누굴 보라고서 예쁘게 피었나” 노래가 생각난다. 활짝 핀 꽃은 못 봤지만, 누가 보든 안 보든 아름다운 꽃을 피운 목단. 묵묵히 할 일을 해내며 살라는 건가. 또 하나 배운다.
글·사진 김송은 송송책방 대표*농사꾼들: 농사를 크게 작게 지으면서 생기는 일을 들려주는 칼럼입니다. 지역이 다른 네 명의 필자가 돌아가며 매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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