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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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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질서한 대지에 입맞춤을

‘무경운 자연농법’ 이연진 농부의 홍성군 풀풀농장
등록 2023-01-01 14:35 수정 2023-01-01 16:29
풀풀농장 이연진 농부. 박기용 기자

풀풀농장 이연진 농부. 박기용 기자

‘이게 밭인가’ 싶었다. 이랑에 작물과 검은 비닐, 고랑에 흙이 드러난 흔한 밭과는 확실히 달랐다. 풀과 작물이 섞여 무질서해 보였다. 무언가 자라지 않은 곳은 바닥이 갈색의 마른 풀로 덮여 있었다. 흙 자체가 보이지 않았다.

충남 홍성군 홍동면 풀풀농장의 이연진(48) 농부가 농사짓는 모습은 독특했다. 2022년 12월23일 이씨의 농가를 찾았다. 최근 유독 눈이 많이 내린 터라 이씨의 밭도, 그 일대도 모두 눈으로 덮여 있었다. 그는 ‘자연농법’으로 농사짓는 사진 몇 장을 보여줬다. 땅을 갈지 않고(무경운), 작물과 풀을 함께 키우고, 작물을 수확하고 나면 다시 풀밭으로 둔다. 계절이 바뀌며 말라서 삭은 풀은 거름이 되고 땅을 살찌운다. 땅을 갈지 않아 탄소를 토양에 고정하는 자연농법은 기후위기 시대에 한층 더 주목받는다.

14년 전 홍성으로 귀농한 이씨는 “당시 목표가 석유에 의존하지 않는 농사였다”고 말했다. 귀농 전 그는 환경운동단체인 녹색연합의 열성 회원이었다. 환경운동가인 아내와도 녹색연합에서 처음 만났다.

“지금의 농사가 석유를 많이 쓰는, 에너지 의존적이라 생각했죠. 도시에서 회사 다니며 석유 쓰면서 산업 활동을 하는 거나 시골에서 트랙터나 기계, 석유 써가며 농사짓는 거나 마찬가지인 거예요. 그러면서까지 굳이 시골로 갈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어요.”

귀농 3~4년이 지난 어느 날 ‘자연농업’이란 말을 처음 들었다. 누가 “너처럼 하는 게 자연농이야”라고 했다. 그제야 일본 자연농의 대가인 가와구치 요시카즈가 쓴 책을 보고 일본에 견학 갔다. 그 뒤 체계적으로 이론적 뒷받침을 받아가며 그만의 농사를 일굴 수 있었다.

알아서 비료가 자라는 밭

자연농법은 외부 거름(양분)을 넣지 않는 것을 기본으로 한다. 이를 위한 핵심 수단이 무경운(토양을 갈지 않음)이다. 풀을 베어내지 않고 풀을 이용해 작물을 키운다. 농장 이름이 ‘풀풀’인 것도 이 때문이다. 작물이 자라는 초기에만 주변을 정리한 뒤 자리를 잡으면 작물과 풀을 함께 키운다. 덩이뿌리 작물인 고구마나 감자를 심을 때 어쩔 수 없이 파낸 땅도 원래 형태로 되돌려놓는다. 그렇게 줄잡아 30~40가지 작물을 한 밭에서 동시에 키운다.

“처음엔 풀을 열심히 베어냈죠. 흙과 작물만 있는 흔한 형태인데 동네에서 유기농 하는 선배가 ‘밭에서 빼먹기만 하면 농사가 되겠냐’고 하더라고요. 고민하면서 이런저런 시도를 하다 생각을 전환했죠.”(이연진 농부)

작물이 아닌 풀도 저마다 이름이 있다. 자연농은 풀의 생태를 알아야 한다. 처음 2~3년 그의 밭에서 주로 자란 풀은 참비름, 쇠비름, 명아주였다. 한데 조금 지나니 이 풀들이 사라졌다. 이씨는 이 풀들이 땅의 ‘과영양’을 먹고 자라는, 거름이 많은 환경에서 자라는 풀이라고 이해했다. 지금은 헤어리베치, 오처드그라스, 쑥이 자리잡았다. 헤어리베치는 콩과작물이라 밭에 질소를 고정하는 구실을 한다. 잎과 줄기가 거름이 되는 풋거름작물로 유기농에선 화학비료를 대체한다. 오처드그라스는 주로 사료로 쓰지만 역시 풋거름작물이다. 그냥 놔뒀는데 밭에서 알아서 비료가 자란 셈이다. 이씨는 이 풀들이 무리 지은 곳을 피해 작물을 심는다. 최소한의 관리만 할 뿐 따로 비료를 쓰지 않고 땅의 기본체력만으로 작물을 키운다. 시간이 지나면 또 무언가 다른 풀이 밭에 스며들 거라 기대하면서.

물론 이씨의 자연농법은 ‘경제적’이지 않다. 수확한 작물은 수분이 적고 치밀해 단단하지만, 모양이 정형이 아닌데다 크기가 작아 상품성이 떨어진다. 소출도 제한적이다. 이씨는 논농사까지 포함해 4천 평(1만3220㎡) 규모의 농사를 지으며 회원 30명에게 한 달에 두 번 대여섯 가지 작물을 넣은 ‘꾸러미’를 보낸다. 매달 서울의 직거래 장터를 오가고 농한기엔 별도로 농가주택을 짓는 일까지 하지만, 부부가 아이 셋을 키우는 이씨 가구의 연소득은 도시민의 최저생계비 수준인 3천만원대다. 그도 다른 이에게 “생계로 하라곤 못하겠다”면서도 “건강한 농산물과 가치를 소비하려는 소비자에겐 어필할 수 있다 생각한다”고 말했다.

이연진 농부의 밭에서 자라는 들깨. 이연진 제공

이연진 농부의 밭에서 자라는 들깨. 이연진 제공

화학비료, 각종 기후위기 문제의 출발점

우리가 먹는 농산물은 대부분 화학비료를 뿌린 땅에서 합성농약의 보호를 받고 자란다. 한국 농업의 95%(2021년 재배면적 기준)가 관행농(농약과 화학비료를 사용하는 농가)이기 때문이다. 이씨 같은 자연농은 한국에서 손에 꼽을 정도다. 넓게 보아 자연농까지 포괄하는 개념의 유기농이 확산하지 못하는 건 무엇보다 경제성 때문이다. 유기농으로 지금의 인구를 먹여 살릴 수 있느냐가 핵심이다.

작물의 생산량은 대개 토양의 질소(N2) 함량에 비례한다. 질소는 대기의 대부분(80%)을 차지할 정도로 흔하지만, 식물에 기대 사는 특정 미생물만이 이를 암모니아(NH3)로 변환해 식물이 이용할 수 있게 한다. 콩과작물의 뿌리에서 사는 뿌리혹박테리아가 대표적이다. 수천 년간 인류가 농경하며 땅의 지력을 위해 콩과작물을 심어온 것도 이 때문이다. 그러다 1920년대 암모니아를 대량생산하는 기술(하버-보슈법)이 만들어졌다. 뿌리혹박테리아가 주로 만들고 이따금 번개에 의해 생겨나던 암모니아를, 인류가 필요에 따라 마음대로 생산하게 된 것이다. 유엔식량농업기구에 따르면 이후 1950년대까지 세계 농업생산량은 60% 늘었고 2001년 2배로 증가했다. 20세기 초기 16억 명이던 세계 인구도 2011년 70억 명으로, 다시 2022년 80억 명으로 늘었다. 세계 인구 폭발의 배경에 화학비료 발명이 있었다. 늘어난 인구 덕에 기후위기를 비롯한 각종 문제가 촉발했으니 결국 화학비료가 모든 문제의 시작인 셈이다.

대량생산된 암모니아는 기후위기에 직접 작용하기도 한다. 암모니아는 미생물에 의해 아산화질소나 산화질소로 바뀌어 다시 대기로 날아가는데, 아산화질소는 이산화탄소보다 온실효과가 300배나 크다. 전체 온실가스의 6%에 불과하지만 80%가 농업에서 배출된다. 사료작물 재배 등의 이유로 농지 70% 이상을 잡아먹는 축산까지 아우른 전세계 식품산업체계가 배출하는 온실가스는 전체의 4분의 1에 이른다. 기후위기를 해소하려면 농업 문제를 어떻게든 풀어야 한다.

다큐멘터리 <대지에 입맞춤을>(Kiss the Ground)은 ‘무경운 농법’을 강조한다. 넷플릭스 화면 갈무리

다큐멘터리 <대지에 입맞춤을>(Kiss the Ground)은 ‘무경운 농법’을 강조한다. 넷플릭스 화면 갈무리

탄소 접착제 만들어 탄소를 잡아 가두는

탄소를 토양에 잡아 가두는 무경운 농업이 주목받는 것도 이 때문이다. 단순히 탄소배출량을 줄이는 것뿐 아니라 이미 배출한 탄소를 흡수할 수 있기 때문이다. 오래전부터 자연에 존재해온 탄소포집 기술이다. 넷플릭스에서 시청 가능한 미국 다큐멘터리 <대지에 입맞춤을>(Kiss the Ground)도 무경운 농법을 강조한다. 경운하지 않는 유기농업(다큐에선 이를 ‘재생농업’으로 부른다)은 지표식물의 생장을 도와 탄소를 땅속에 포집할 수 있게 한다. 광합성을 하는 식물이 흡수한 대기 중 탄소는 토양 속 미생물에 제공되는데, 미생물은 그 대가로 질소를 비롯한 무기영양소를 공급한다. 그 과정에서 ‘글로말린’이라 부르는 탄소 접착제가 만들어진다. 식물은 글로말린을 이용해 토양 속에 탄소를 잡아둔다.

반면 오늘날 대규모 농업은 땅을 갈아 지표식물을 제거해버려 이들이 잡아 가둔 탄소를 다시 대기로 퍼뜨린다. 경운하면 식물의 뿌리와 이에 기반한 미생물, 농업에 이로운 곤충과 지렁이가 다니는 통로, 수분 이동로가 모두 파괴된다. 또 화학약품으로 범벅이 된 땅은 장기적으론 농사에 도움되는 생물이 살기 어려운 구조가 돼 토양이 황폐화하고 사막화한다.

다큐에선 축산의 경우도 소를 방목해 키우면 오히려 탄소를 흡수하는 구실을 한다고 설명한다. 원래 자연 상태의 소들은 초원을 거닐며 풀을 뜯고 거름이 되는 배설물을 남겨 식물 생장에 도움을 주기 때문이다. 반면 바닥이 시멘트이거나 메마른 흙먼지만 있는 공장식 축산의 비육장에선 배설물이 땅에 흡수되지 못해 탄소배출원으로 작용한다. 다큐에 출연한 미국의 보존농업학자 레이 아출레타는 전세계적으로 경운이 한창인 4월과, 식물이 자라기 시작하는 6월의 지구 대기 중 이산화탄소 농도를 비교하며 이를 설명한다. 결국 땅을 갈지 않고 지표의 식물을 그대로 둬야 인류와 지구도 살 수 있다는 것이다.

경운하지 않는 자연농법은 비교적 오래된 기술이지만 기후위기로 새삼 주목받고 있다. 특히 남미 지역에서 활발하다. 아르헨티나, 파라과이, 우루과이는 경운하지 않은 농지가 더 많다. 이들 나라에서 무경운 농법 도입 이후 농업 생산성과 농가 소득이 오히려 늘었다는 보고도 나온다. 국토 대부분이 건조기후인 오스트레일리아도 1960년대부터 무경운 농법을 한 나라다. 한반도 면적보다 큰 2300만㏊가량의 농경지 67%가 무경운이다. 미국은 농경지 21%(2017년)에서 무경운 농법이 시행된다. 국내에선 전남농업기술원 친환경농업연구소의 양승구 박사가 2019년 무경운 토양이 경운 토양보다 온실가스를 59% 줄이며 작물 생산량도 오히려 많았던 사례를 발표했다. 하지만 농림축산식품부는 무경운 농지의 경우 표준농법이 아닌 것으로 보아 직불금을 지원하지 않는다. 무경운 농법을 지원·장려하는 제도적 장치는 국내에 아직 전무하다.

지속가능, 누구나 할 수 있는, 근본으로 돌아간 농사

이연진 농부는 도시민이 자신들이 먹을 만큼 자연농법으로 농사를 지으면 생각보다 많은 문제가 풀릴 거라고 강조했다. 그의 목표도 애초 “지속가능하면서 누구나 할 수 있는 자연농”이었다.

“서울에 있는 사람들이 텃밭을 자연농으로 하면 좋겠다고 생각해요. 반려견과의 공감처럼 작물과의 공감이 이뤄지기도 하거든요. 작물도 나를 키워주는 농부를 위해 큰다고 합니다. 농약 안 쓴 작물을 먹는 것에서 나아가 본인이 직접 키운 농산물을 먹는 것, 팔지 않고 내가 먹으려는 농사, 근본으로 돌아간 농사가 건강한 세상을 만드는 출발이라고 봅니다.”

홍성(충남)=박기용 기자 xeno@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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