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오후 만리재에 손님이 찾아왔다. 오랜만에 마주한 그의 얼굴은 예전보다 더 까맣게 그을린 듯했다. 요즘 부쩍 거리에서 보낸 시간이 길어진 탓이려나. 차마 그것까지 묻진 못했다. 대신에 물었다. “노란봉투네요.” 까만 얼굴 아래, 회색 티셔츠 옷깃에 노랗게 반짝이는 배지가 하나 달려 있었다. 34년간 거리를 지켜온 인권운동가 박래군에게 이날 직함이 하나 더 늘었다. 그는 4·16재단 상임이사, 인권재단 사람 상임이사에 이어 ‘노조법 2·3조 개정 운동본부 공동대표’까지 맡았다.
박래군 공동대표는 이날 오전 서울 여의도 국회 앞에서 ‘노란봉투법’(노동조합법 개정안) 제정을 촉구하는 기자회견을 마치고 만리재로 넘어온 참이라고 했다. 이날 우리의 대화 주제는 다른 사안이었으나, 노란봉투법을 이번호 <한겨레21>에서 제대로 다루지 못했다는 꺼림칙한 마음이 그의 얼굴을 보는 순간 삐쭉 고개를 내밀었다. 나도 모르게 물었다. “노란봉투 배지는 이번에 새로 만든 건가요?”
노란봉투법의 시작은 2013년이다. 쌍용자동차 노동자들이 정리해고에 맞서 파업을 벌인 뒤 46억8천만원을 손해배상해야 하는 ‘폭탄’을 맞았다. 회사 또는 국가가 손해배상청구소송(손배소)과 가압류로 노동자의 파업권을 제한하는 ‘재갈’이었다. 시민사회단체들이 대대적으로 ‘노란봉투’ 캠페인을 벌였고, 파업의 대가로 월급을 차압당하는 노동자를 위해 모금하는 시민의 마음이 차곡차곡 모였다. 국회에서도 관련한 법안이 발의됐다. 회사가 노조원 개인을 상대로 손배소를 내지 못하게 하거나, 손해배상 최대 상한선을 못박아두는 등의 내용을 담은 법안이다.
하지만 9년 가까이 지난 지금까지도 노란봉투법은 국회를 통과하지 못했다. 최근 대우조선해양 비정규직 노조와 하이트진로 화물기사 노조가 파업을 벌였다는 이유로 또다시 거액의 손배소를 당했다. 2022년 9월, 시민사회단체 93곳이 다시 뭉친 이유다. ‘노조법 2·3조 개정’을 주장하는 이유는 이렇다. 노동조합법 제2조는 노동조합, 사용자, 쟁의행위 등을 정의한다. 비정규직을 직접 고용하지 않은 원청기업은 사용주에 해당하지 않는다고 해석된다. 이 때문에 손해배상 청구를 제한한 노동조합법 제3조 또한 파업의 절차, 수단 등에 따라 제한적으로만 ‘합법 쟁의행위’로 여겨진다. 이를테면 대우조선해양 하청업체 비정규직이 원청을 상대로 파업을 벌였다면, 교섭권이 없는 원청 사용자가 하청 노조를 상대로 손배소를 낼 수 있다는 뜻이다.
이제 다시 국회의 시간이다. 이은주 정의당 의원은 9월15일 정리해고에 반대하는 파업도 정당한 쟁의행위에 포함하는 내용 등을 담은 노란봉투법을 대표 발의한 뒤 “올해 정기국회를 저임금 하청노동자의 노동기본권을 보장하는 ‘옐로 윈터’(노란 겨울)로 만들겠다”고 말했다. 더불어민주당 역시 이번 정기국회에서 노란봉투법을 통과시킬 의지가 있다고 밝혔다. 경영계는 ‘불법 쟁의행위 면책법’ ‘사용자 재산권 침해’라며 반발하지만, 어느 때보다 노란봉투법 통과만큼은 국회에서 ‘파란불’이 켜지려는 상황이다.
다만, 현재 국회가 전반적으로 ‘빨간불’에 멈춰 있다는 점이 변수다. 윤석열 정부와 검찰·경찰은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를 향해 동시다발적인 강도 높은 수사를 벌이고, 이에 민주당은 특검으로 김건희 여사 관련 의혹을 수사하자고 맞불을 놓았다. 이완 기자가 이재명 대표를 둘러싼 여야의 적대적 공존 관계에 대해, 김규원 기자가 정권이 바뀔 때마다 ‘정치 보복’ 수사가 반복되는 이유를 짚었다. 더불어민주당 쇄신기구인 ‘새로고침위원회’에 외부 위원으로 참가했던 이관후 서강대 사회과학연구소 박사(정치학)가 분석했듯이, 민주당은 그동안 “눈앞의 이해관계만 따라”다니는 바람에 “전투에서는 이기고 전쟁에서는 지는 것”을 반복했다. “복지, 환경, 민생을 간절히 원하는 잠재적 지지층이 민주당을 기다리고 있다”면, 당 전체가 이재명 대표의 ‘두 번째 전쟁’에만 몰두하기보다 지금까지 응답하지 못했던 노란봉투법 제정 같은 약속을 지키는 일이 먼저 아닐까.
황예랑 편집장 yrcomm@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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