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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도, 적당히 옵서예

등록 2022-06-14 12:43 수정 2022-06-15 01:36
1417호 표지이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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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그림에는 나무가 자주 등장한다. 초록색 이파리가 무성한 나무는커녕, 마지막 잎새 하나도 달리지 않은 벌거벗은 나무가 대부분이다. 앙상한 나뭇가지, 뭉툭하게 끝이 잘려나간 나뭇가지…. 학교 미술책에서 그의 그림을 봤을 때만 해도 나는 그 나무들이 죽어가거나, 겨울나무인 줄만 알았다.

몇 달 전, 덕수궁 국립현대미술관에서 열린 특별전시회에서 그의 그림을 직접 보고서야 알았다. 어디서나 흔히 보는 그냥 나무가 아니었다. 늠름하게 뿌리 내린 채 서 있는 나무, 잎도 열매도 없는 나무인데도 숨 쉬는 것처럼 생명력이 있는 나무, 자신은 헐벗었지만 그 아래 쉬는 사람을 감싸안은 것처럼 따듯한 나무였다. 신기했다. 분명 나무는 어두운색인데, 알 듯 모를 듯 희미한 연둣빛이 비쳤다. 특별전시회 제목은 ‘봄을 기다리는 나목’이었다.

그를 주인공으로 삼은 소설 <나목>을 쓴 박완서 작가가 그에 대해 남긴 문장에서처럼. “그가 즐겨 그린 나목을 볼 때마다 그해 겨울, 내 눈엔 마냥 살벌하게만 보이던 겨울나무가 그의 눈에 어찌 그리 늠름하고 숨 쉬듯이 정겹게 비쳐졌을까가 가슴이 저리게 신기해지곤 한다.” 그의 이름은 박수근이다.

이번호 표지이야기에 김양진 기자가 쓴 제주 제성마을 왕벚나무와 ‘할망’들의 이야기를 읽으면서, 박수근의 그림 속 나무들을 떠올렸다. 할망들은 1980년대 초반 제주공항을 확장한다는 이유로 살던 마을에서 쫓겨났다. 뿌리 내릴 곳을 잃은 이들은 허허벌판이나 다름없던 터에 곡괭이로 돌을 깨어 나르고 하수도를 만들며 제성마을을 세웠다. “사람 사는 데는 나무가 있어야 한다”면서 손목만 한 왕벚나무 묘목을 한라산에서 구해와 직접 심은 것도 마을 주민들이었다. 그렇게 할망들은 40여 년을 마을에서 왕벚나무와 함께 살았다. 도로를 확장한다며 제주시가 14그루 중 12그루를 베어버린 것이 “애닯도록 절실한”(<나목> 중에서) 까닭이다. 할망들은 성냥개비인 양 와자작 찢긴 나뭇가지를 주워다가 꺾꽂이해 화분 100개를 만들었다. 나무는 죽지 않았다. 화단에 옮겨심은 뿌리 조각에서도 새싹이 올라왔다.

2018년 제주 비자림로 확장 공사 탓에 삼나무숲이 훼손된다는 소식을 듣고는 제성마을 할망들만큼은 아니지만 애달팠다. 삼나무 숲길을 지나 도로 끝에 위치한 비자림에서 나무들 덕분에 위로받았던 기억 때문이다. 2017년 봄, 일과 사람에 지쳐 제주도에 도착한 내 손을 끌고 제주에 살던 친구가 간 곳이 비자림이었다. 친구는, 종종 저녁 산책을 올 만큼 좋아하는 곳이라 했다. 수백 년 된 비자나무 수천 그루를 옆에 끼고 폭신폭신한 흙길을 걸으며 지친 마음을 그곳에 내려놓고 돌아왔다.

제주 구좌읍 월정리에서 3년 가까이 식당을 운영했던 그 친구를 만나러 가끔 월정해변에 갈 때마다 눈이 휘둥그레졌다. 힙한 카페며, 아기자기한 소품 가게며, 고급스러운 펜션이 해마다 늘었다. 월정해변이 그렇게 인기를 끄는 사이, 바다는 병들어가고 있었을까. 표지이야기 속 주인공인 월정리 해녀 할망들이 하수처리장 증설을 저지하기 시작한 시점도 2017년 무렵이었다. 지금도 해녀들은 조를 짜서 8개월째 24시간 보초를 서며 공사를 막고 있다. 깨끗한 바다를 지키기 위해서다.

홍영철 제주참여환경연대 공동대표가 글에 썼듯이 “늘어나는 관광객에 맞춰 난개발을 확대재생산하는 제주의 잔혹사”가 여기저기서 계속되고 있다. 과잉관광, 난개발에 몸살 앓는 제주를 낫게 하려면 무엇이 필요할까. 여름휴가철을 앞두고, 독자 여러분과 이야기 나눠보고 싶다.

황예랑 편집장 yrcomm@hani.co.kr

1417호 표지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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똥물 바다에 그 흔한 우뭇가사리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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