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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멸의 모순

등록 2021-11-24 12:25 수정 2021-11-24 23:23
1389호 표지이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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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마을 이장님은 필리핀댁’. 11월1일 아침 <조선일보> 1면 제목을 보고 잠시 고개를 갸웃했다. 다른 신문을 잘못 봤나, 싶었다. ‘소멸 위기 마을에 이주민들이 터 잡고 생기를 불어넣어 주고 있다’는 내용의 기사였다. 전북 무주군 최초의 결혼이주여성 ‘이장님’이 동네 어르신들과 사진 속에서 환하게 웃고 있었다. 폐교 위기에 놓인 초등학교가 다문화가정 출신 학생들 덕분에 유지된다는 훈훈한 내용도 이어졌다. 불법체류 외국인노동자, 이슬람교도, 조선족에게 종종 홉뜨는 평소와는 달랐다. 하긴, 예전부터 한국 사회 주류 담론은 결혼이주여성 등 법적 지위가 확실한 ‘다문화가정’에는 따듯했다. 외국인노동자는 값싼 노동력을 제공해 한국인 일자리를 빼앗거나, 범죄를 저지르는 혐오스러운 존재로 묘사됐을지언정.

그것은 어떤 모순, 또는 균열 지점이다. ‘지역 소멸 위기’ ‘저출생’ ‘농어촌과 건설업, 돌봄업의 인력난’ 등 한국 사회가 맞닥뜨린 문제를 고민하다보면 결국 마지막에 도달하고야 마는.

‘소멸’이라고 하지만, 이는 단순히 사라짐의 문제가 아니다. 지역의 인구 감소만 하더라도 청년들이 떠나지만, 그 자리의 일부는 이주민이 채운다. 단지 그중에는 미등록/불법이라는 이유로 ‘인구’ ‘시민’으로 헤아려지지 않는 존재가 많을 뿐이다. 일자리도 그렇다. 일자리 감소가 아니라, 괜찮은 일자리가 줄어들어서 문제다. 내국인이 탈출한 저임금 일자리를 메우는 것은 이주노동자다. 이들은 곰팡이로 뒤덮인 비닐하우스에서, 오징어잡이 배 위에서, 외줄 하나에 의존해 고층 건물 외벽에서 일한다.

한국을 떠받치는 기간산업인 조선업조차 그렇게 돼간다. 세계 선박 시장에서 한국은 수주 1~2위를 다툰다. 조선소는 높은 임금을 받는 안정적인 직장으로 여겨졌고, 이른바 빅3(현대중공업·삼성중공업·대우조선해양) 조선소가 있는 울산광역시와 경남 거제시는 ‘중산층의 도시’가 됐다. 하지만 그 안에도 균열이 존재한다. 복잡한 다단계 하청 구조 탓이다. 고임금과 복지 혜택을 누리는 정규직과 그렇지 못한 비정규직, 그 비정규직 안에서도 사내하청업체 소속과 외부의 3·4차 하청업체 소속 비정규직, 떠돌이 봇짐장수처럼 단기 일감을 맡는 ‘물량팀’ 소속 비정규직이 뒤섞여 있다. 대형 조선소가 있는 도시와, 일감 수주가 어려워져 불황을 겪는 중소 조선소가 위치한 도시의 처지도 다르다. 이러한 피라미드의 가장 밑바닥에 있는 이들이 바로 숫자로는 보이지 않는 존재, 미등록 이주노동자다. 건설업과 농어업, 중소 제조업을 넘어 이제는 국가 기간산업인 조선업까지 이주노동자가 점차 숙련공으로서 떠받쳐간다.

‘2021 소멸도시 리포트’ 세 번째는 일자리를 중심으로 한 마을 이야기다. 방준호 기자가 열흘 동안 현대삼호중공업이 있는 전남 영암군 삼호읍에 머물며 이주노동자, 한국인 노동자, 마을 주민 등 21명을 만났다. 영암군은 행정안전부가 인구감소지역으로 지정한, 대표적인 ‘소멸 위기’ 지역이다. 여기서도 조선소가 자리잡은 삼호읍은 그나마 인구가 많아 면에서 읍으로 승격했다. 이런 삼호읍도 청년이 떠나고, 그 자리를 이주노동자가 채우고 있다. 방준호 기자는 2019년 한국지엠과 현대중공업 공장이 떠난 전북 군산에 6주 동안 머물며 ‘공장이 떠난 도시’(제1269호 표지이야기)를 깊이 들여다본 데 이어, 이번에는 이주노동자라는 특별한 렌즈를 통해 산업도시의 현실을 기록했다.

이 이야기는 훗날 어쩌면 정치적 이야기로 이어질 수도 있겠다. 철강, 자동차 등 제조업에 기반한 미국 러스트벨트

(중서부와 북동부의 사양화된 공업지대) 소도시에서는 경기침체가 이어져 공장이 문을 닫자 중산층 노동자 가족의 삶이 무너졌고, 이러한 지역사회의 균열은 정치적 양극화, 나아가 도널드 트럼프 정권이 등장하는 토대가 됐다. 이 과정을 현미경처럼 기록한 책 <힐빌리의 노래> <제인스빌 이야기>처럼 <한겨레21>은 앞으로도 소멸도시의 또 다른 이야기에도 계속 귀 기울이겠다.

황예랑 편집장 yrcomm@hani.co.kr

*1389호 표지이야기


“출근길이 꼭 외국 같아” [보이지않는노동자의도시①]

https://h21.hani.co.kr/arti/society/society_general/51232.html
팀장님 팀장님 베트남인 팀장님 [보이지않는노동자의도시②]

https://h21.hani.co.kr/arti/society/society_general/51241.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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