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머니가 좋아’ 표지이야기를 쓰기 위해 만난 임봉근 할머니와 임다운 손녀는 인터뷰 중간에 큰소리 나게 싸웠습니다. 지명이나 이름 등을 정정한 기억력으로 또박또박 읊으시더니(할머니는 1931년생입니다), 그걸 받아적는다 싶으면, 펄쩍 뛰면서 그걸 쓰면 안 된다고 하셨습니다. 임봉근 할머니는 자신이 내세울 것도 없는데, 이런 부끄러운 일이 나가면 안 된다며 자신의 이름을 세례명인 임막달레나로 내달라고 합니다. 그 해결은 정말 슬기롭게 이루어졌습니다.
“대단하시다고 온 건데 이야기를 다 해놓고 그렇게 하는 게 어딨어.”(임다운) “아니아니, 임막달레나로 해줘.”(임봉근) “할머니, 내 말 들어서 잘 안 된 것 있어. 시키는 대로 해.”(임다운)
임봉근 할머니의 뜻은 ‘임’이라는 성만 남기겠다는 것이었습니다. 자기 존재를 될 수 있으면 드러내지 않으려 했습니다. MZ세대가 남과 다른 특징으로 자기 존재를 뽐내는 데 비해, 할머니라고 통칭되는 노년 여성들은 임·김·박·이처럼 ‘개인’이 없습니다. 남과 다른 것은 안 되고, 남과 다른 것은 숨기고, 특별한 것은 지운 채 살아왔습니다.
“대단한 할머니들의 공통점은 남편이 없다는 것이었어.”
마감이 끝난 뒤 편집장이 뉴스룸 단체대화방에 메시지를 남깁니다. 아, 그렇구나. 임봉근 할머니는 남편과의 관계가 실패한 뒤 자식들의 성을 바꾸었고, 매일매일 달리는 윤명숙 할머니는 사업 실패 뒤 방에 틀어박힌 남편과 헤어졌습니다. 너무 젊어서 할머니라 붙이기 뭣하지만 영화를 찍는 박은희 감독님의 남편은 결혼 10년 만에 지병으로 세상을 떴습니다. 무슨 연관이 있을까요. 할머니들에게 아무런 흔적이 없었던 것은 다른 사람을 위해서 살았기 때문이 아닌가 싶습니다. 헌신하던 옆자리가 없어지고 나니, 그제야 자신을 위하는 방식이 보였던 게 아닐까요.
가장 존경하는 사람이 누구냐고 물으면 떠오르는 김선주 전 <한겨레> 논설위원은 참 엄살쟁이였습니다. 2006~2007년 무렵 ‘종이비행기47’이라는 코너(1947년생이 쓴다는 데서 나온 코너명입니다)의 원고를 받았는데, 마감이 만날 늦었습니다. 한겨울에 “담배 연기가 방 안에 가득 차서 문 다 열어놓고 있다”며 마감의 괴로움을 열 번 정도 토로한 뒤, 쓰고 지우고를 반복한 흔적이 역력한(뒤에 엔터가 100개는 쳐 있는 것 같은) 원고를, 대체 원고를 찾거나 배열표(기사 배열을 기록한 표)를 바꾸고 광고를 넣어야 하는 양자택일의 순간에 보냈습니다. 언제나 도입은 구수하고, 본론에는 고개를 끄덕이고, 결론에선 머리를 한 번 치는 글들이었습니다.
40년 동안 원고를 써도 언제나 마감에 쫓기는 게 인간입니다. 어른이 쉽게 되지 않고 어른이라고 완벽하지 않습니다. 할머니라는 포근한 이미지, 뭐든 안아줄 것 같은 비슷비슷한 이미지는 할머니의 수만큼 가짜입니다. ‘그렇게 할머니가 돼가는’ 지금, 할머니들이 완벽하지 않다는 점에서 얼마나 든든한지 모릅니다.
표지이야기를 쓰는 기자들끼리 할머니를 대단하게 포장하지 말자, 특별한 삶을 할머니 일반의 것으로 확장하자, 이런 이야기를 했지만, 결국 할머니 이야기를 듣고 옮기니 대단한 분들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기사들에 달린 댓글로 할머니들에게 응원을 보냅니다.
“대단한 할머니입니다!!! 박수” “멋지게 사시네요. 저도 용기와 희망을 가지고 미래를 설계해야겠어요~ 감사합니다. 건행이요.^^”
구둘래 기자 anyon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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