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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토크] 여행업 청년들이 눈을 반짝이던 때

등록 2021-03-13 09:23 수정 2021-03-15 01:49

“아, 저는 지금 명함이 없네요.”

2월25일 만난 여행업 청년 노동자가 머쓱하게 웃으며 말했습니다. 기자가 건넨 명함에 화답하려, 익숙하게 지갑을 뒤지다가 허공에 붕 뜬 손을 책상 아래로 접어 넣었습니다. 그는 2020년 3월 코로나19 사태로 유급휴직에 들어갔다가 그해 9월부터 출근 일수를 확 줄였습니다. 또 다른 청년 노동자에게 인터뷰 약속을 잡기 위해 전화를 걸었을 때입니다. 컬러링으로 익숙한 시엠(CM)송이 나왔습니다. 그가 유급휴직 중인 여행사의 광고 음악이었습니다. “회사에서 주변 사람들한테 홍보하라고 해서 설정한 건데 아직도 그대로네요.” 그도 또 멋쩍게 웃었습니다.

<한겨레21>은 제1353호에서 코로나19 직격탄을 맞고 지난 1년을 버텨온 여행업계 청년 노동자들의 이야기를 전했습니다. 청년단체 복지국가청년네트워크는 청년 여행업 종사자 10명을 심층 인터뷰해, 2020년 12월 ‘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19로 인해 청년 여행업 종사자가 경험하는 불안정성’ 보고서를 냈습니다. <한겨레21>은 이 보고서를 입수해 인터뷰에 응한 청년들을 다시 만났습니다. 27~35살 청년 5명은 3~11년 여행업에 종사하다가 저마다 휴직, 해고, 폐업, 출근일수 축소를 견뎌내고 있었습니다. 정부의 고용유지지원금으로 줄어든 월급을 충당하거나 실업급여를 받는 이들은, 코로나 종식은 요원한데 도대체 언제까지 버틸 수 있을지 모르겠다고 고개를 저었습니다.

청년 노동자들은 불확실성의 소용돌이 속에 소득보장제도, 이직·전직 지원, 직업훈련 제도에 의지하고 있었지만 아쉬운 점을 털어놨습니다. “무슨 일을 해야 할지 모르는 상황에서 (국민)내일배움카드는 혼돈의 바다나 다름없어요.” “생활비에 보태려고 마트 판촉 알바를 했는데 4대 보험에 잡힐까봐 엄마 계좌로 8만원의 하루 일당을 받았어요.” 보고서는 이렇게 진단합니다. “청년 노동자들이 지적한 정책의 문제들은 사실 코로나19 이전에도 존재했던 문제점들이었다. 예상치 못한 위험으로부터 노동자들을 보호해야 하는 사회안전망이 제 역할을 하지 못하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코로나로 인해 받는 사회 전반적 타격과 불안정은 이미 예견된 것인지 모른다.” 재난은 매번 다른 얼굴을 하고 찾아옵니다. 코로나가 종식된다 하더라도, 이런 취약점을 개선하지 않는다면 대상만 달라질 뿐 문제는 반복될 가능성이 큽니다.

두세 시간 진행된 인터뷰에서 그들이 가장 눈을 반짝일 때가 기억납니다. 왜 여행업을 택했는지 물었을 때입니다. “대학생 때 한 달 정도 유럽 여행을 다녀왔는데, 봐도 모르겠던 건축양식이 가이드 투어를 하니 전혀 달리 보이는 거예요. 여행을 소개해주는 직업을 갖고 싶다고 처음 생각했어요.” 취업 문턱이 낮다는 말에 여행업에 덜컥 발을 들여놓은 이들도 직무와 회사에 애착이 컸습니다. “(해외) 출장도 많고, 외국 업체와 연락해야 하다보니 자연스레 언어도 늘게 돼요. 그런 특권이 있었어요.” 이직으로 내딛는 발걸음이 가벼울 리 없습니다. 그러나 계약직으로 회사에서 가장 먼저 내쫓기고 50곳에 원서를 넣은 끝에 타 업계로 취직에 성공한 또 다른 노동자는 면접 과정에서 “여행업이 나아지면 또 돌아가는 거 아니냐”는 질문을 받아야 했습니다.

‘어쩔 수 없다. 조금만 더 버텨보자.’ 그들에게 언제까지 이렇게 말할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고한솔 기자 sol@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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