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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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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장의 편지-만리재에서] 계획과 우연

등록 2020-04-11 17:12 수정 2020-05-07 10:50
만리재에서

만리재에서

“법조에 다시 가야겠어.”

2010년 3월 어느 날 새벽, 잠을 자다가 요란하게 울리는 휴대전화를 받았더니 사회부장이 대뜸 말했습니다. 1월부터 벨기에 브뤼셀에 있는 유럽연합(EU)을 취재하는 ‘단기특파원’으로 일하던 나는 며칠 뒤 귀국할 참이었습니다. 인사철을 맞아 뉴스룸이 들썩인다는 소식은 전해들었지만 그 여파가 8700㎞ 떨어진 이곳까지 뻗칠지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습니다. 탄식이 절로 나왔지만 “싫어요”라는 말을 차마 내뱉지 못한 것은 잠결이어서만은 아니었습니다. 3개월의 짧은 기간이었지만 유럽 곳곳을 기차로 돌아다니며 취재할 수 있게 해준 조직(<○○신문>)이 내게 부여한 직분(법조기자)을 거부할 배짱이 없었습니다.

두 차례 걸쳐 5년간 출입하며 대북송금 특별검사(2003년)부터 노무현 대통령 수사(2009년)까지 취재했던 곳, 기자로서는 성장했지만 인간으로는 쇠락했던 그 서울 ‘서초동 법조타운’에서 또다시 일하는 것은 힘겨웠습니다. 하루하루 갑갑증은 더해갔고 그곳에서 탈출하려는 방법으로 결국 이직을 선택했습니다. 그렇게 그해 9월 <한겨레> 기자가 됐습니다.

10년이 지난 2020년 3월, 초짜 부서장으로 첫 인사(人事)를 앞두고 ‘가고 싶은 사람은 가고 싶은 곳에, 오고 싶은 사람은 오고 싶은 곳에’라는 단순명료한 계획을 세웠습니다. 20년 가까이 부서원의 경험에 비춰 실행할 수 있을 것이라 기대했습니다. 완벽한 착각이었습니다. 부서원의 희망에 맞춰 공급과 수요를 딱 맞추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운 도전이었습니다. 이리저리 부딪히고 넘어지는 실수의 연발이었습니다. 아이를 낳은 뒤 엄마의 위대함을 발견하듯 그동안 만나왔던 부서장들의 노련함에 새삼 감탄했습니다.

서툰 편집장을 만나 인사 과정에서 우왕좌왕했으면서도 너그럽게 웃으며 떠난 기자들이 있습니다. <한겨레21> 터줏대감 축에 들었던 허윤희 문화팀장과 하어영 정치팀장이 <한겨레> 문화부 책지성팀과 토요판부로, 막내 라인을 구축했던 이재호·조윤영 기자가 <한겨레> 사회부 사건팀과 법조팀으로 나란히 자리를 옮겼습니다. 앞서 전정윤 사회팀장과 이춘재 기자는 <한겨레> 국제부장과 사회부장으로 승진했답니다. 그보다 앞서 김현대 기자는 한겨레신문사 대표이사가 되어서 뉴스룸을 떠났습니다.

그리고, 여기 <한겨레21> 손을 맞잡아준 새로운 기자들이 있습니다. 조일준, 김규원, 전종휘, 박현정, 김규남, 신지민, 고한솔 기자입니다. 20년, 10년, 5년 만에 다시 만나는 반가운 이들도 있고, 시사주간지라는 미지의 땅에 처음 착륙한 이들도 있습니다. 경력으로는 5년차부터 27년차까지, 나이로는 30대 초반부터 50대 초반까지 그 구성도 다채롭습니다. 편집장의 ‘계획’이 해내지 못한 ‘우연’의 결과물이 어벤저스라니. 결과가 좋으니까 고달팠던 과정은 추억담이 되겠네요.

새 기자들과 함께 만들어갈 <한겨레21>이 어떤 모습일지 아직 모릅니다. 그래서 호기심과 궁금증이 더 큽니다. 기자 여러분! 산뜻하고도 깊이 있는, 기사 발제 기대할게요. 회의는 내일입니다. 독자 여러분! 그 결과물을 다음호부터 즐기게 될 겁니다.

정은주 편집장 ejung@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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