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탈리아 산타체칠리아음악원은 세계에서 가장 오래되고 권위 있는 음악 교육기관 중 하나다. 1585년 로마에 설립된 이곳은 성악가 조수미씨가 나온 학교로 우리에게도 낯익다. 얼마 전 이 학교는 교직원들에게 중국, 한국, 일본 등지에서 온 학생 81명의 수업 참여를 금지하라는 전자우편을 보냈다. 2년 동안 고향 땅을 밟지 못한 한국 학생도 포함됐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예방이 이유였지만 그 작동 기제는 순전히 인종적, 민족적, 국가적 분류였다. 중국 우한에서 왔는지, 이탈리아에 계속 머물렀는지 등 인종 외 변수는 무시됐다. 대학 의료진이 2월5일 오후 2시 동아시아 학생들을 검진해서 이상이 없다고 판정한 경우에만 수업에 다시 참여할 수 있도록 했다.
당신이라면 어떻겠는가? 우리나라 대학이 유학 온 모든 중국 학생의 수업 참여를 금지한다면? 지구촌 곳곳에서 잠재된 위험에 맞서 쉽게 차별과 혐오를 표면화하고 합리화한다.
비슷한 일은 오스트레일리아에서도 있었다. 4대 미항 중 하나로 꼽히는 시드니에 있는 여자 사립학교에서 한 학생이 기숙사 퇴거 요청을 받았다. 지난달 건강검진에서 아무 이상 없다는 판정을 받은, 건강한 학생이었지만 ‘그들’이 보기에 특이점이 있었다. 지난해 10월 중국 상하이를 방문한 한국계였다. 학교장은 “모든 교직원과 학생의 안전을 확보하기 위한 예방적 조처”라고 해명했다. 지난해 12월 신종 코로나바이러스가 처음 발병하기 2개월 전 중국, 그것도 상하이를 방문한 것이 바이러스 전파와 무슨 상관이 있다는 말인가. 바이러스의 위험성과 공포가 순식간에 특정 인종과 민족, 국가의 배제와 혐오로 확대되고 있다. 다수를 보호하기 위한 예방이 명분이지만, 그 적용엔 이성도 합리도 논리도 과학도 없다.
그 극단의 역사는 숱한 제노포비아를 낳았다. 14세기 유럽을 덮친 흑사병은 유대인 집단학살로 이어졌다. 유대인과 집시, 한센병 환자가 흑사병을 전파시킨다는 믿음 아래 거세됐다.
2020년 프랑스, 영국, 헝가리 등지에서 동양인을 ‘바이러스’ ‘병균’으로 조롱하는 피해 사례가 보고된다. 모욕과 폭언을 넘어 중국인을 향한 신체적 폭력도 나왔다. 인구 7억4천만 명이 넘는 유럽에서 신종 코로나바이러스로 사망한 사람은 한 명도 없고, 확진자 30여 명이 나온 지금 빚어지는 풍경이다.
우리는 과연 예방적 조처의 합리적 기준을 세울 수 있다고 쉽게 자신하는가?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 사태로 쏟아진 수많은 기사 가운데 뇌리에 각인된 충격적인 장면은 박현숙 자유기고가가 지난호(제1298호)에 쓴 글에 있다. “(베이징수도)공항에서 (아이들을) 기다리는데, 열감지기에 걸린 사람을 자루 같은 것에 꽁꽁 싸맨 채 경찰들이 에워싸 이송하고 있었다. 온몸이 꽁꽁 묶인 사람이 발악하며 ‘날 왜 잡아가냐’고 소리 치며 울부짖는다.”
새벽 2시를 넘긴 시각, 열이 있다는 것만으로 체포돼 어디로 질질 끌려간다는 상상은 두렵고 불쾌하기 짝이 없다. 내가 어느 나라 사람인지, 어떤 인종인지, 어느 나라를 다녀왔는지, 몸에 열이 있는지가 이유가 돼 ‘울부짖는’ 그 사람이 될 수도 있다는 생각에 몸서리쳐진다. 우리, 사회, 국가의 안전할 권리 앞에 잠재적 감염자나 전파자로 의심받는 나의 존엄성은 한순간 무너질 수 있다.
예방적 조처 기준이 발열이 될 수 있는가. 혹은 이탈리아의 음악학교나 오스트레일리아의 어느 사립학교처럼 그냥 인종이 될 수 있는가. 그런 기준에 따른 배제와 퇴출, 체포가 곳곳에서 벌어진다. ‘모호한 경계’ 가운데 우리는 서 있다. 유럽인들의 우리를 향한 시선으로 우리는 중국인을 보고, 우리 내부의 감염의심자나 유증상자, 확진자를 바라본다. 경계의 모호성과 위험성을 잊은 채 공포에 사로잡혀 쉬이 ‘타인’의 권리가 무시된다. 하지만 어느 순간 내가, 내 가족이 타인이 될 수 있다.
류이근 편집장 ryuyigeun@hani.co.kr한겨레21 인기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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