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말 맞니? 6층 테라스에서 담배를 태우다 마주친 선배는 새롭게 들은 소식이 사실인지 안달했다. 순간 당황했다. 아직 회사에 아는 사람이 몇 안 되는데. 잠시 뜸을 들인 뒤 어떻게 알았냐고 되물었다. 뉴스 출처는 의외로 점심때 만난 국가정보원 직원이었다. 얼마 뒤 또 다른 선배가 하필 그 직원을 만났다는 소식에 불편한 느낌이 커졌다.
취재에 필요하면 정보기관 요원을 포함해 기자가 만나지 못할 사람이 없겠지만, 한겨레를 담당하는 국정원 직원 하나를 많은 기자가 돌아가면서 만나는 현실은 뭔가 수상했다. 당시만 해도 국정원은 언론사별 담당을 두던 때다. 한겨레가 오랫동안 언론사를 대상으로 한 국정원의 정보 수집을 비판했는데, 기자 하나하나는 나름의 이유로 그들과의 만남을 피하지 않았다. 결론은 빤했다. 국정원 직원 한두 명이 많게는 수십 명을 만나면서 정보를 캐냈다. 조금씩 조금씩 퍼즐을 맞춰 우리 회사의 형편을 속속들이 알고 있었다. 심지어 우리사주조합원들의 투표로 사장을 선출하는 한겨레 대표이사 선거 결과를 예측했다. 대부분의 한겨레 식구들조차 모르는 속사정을 꿰고 기자들을 만나 역으로 정보를 흘려주는 ‘웃픈’ 현실이었다. 우리가 내부를 아는 것보다 밖의 정보기관이 우리를 더 잘 안다는 생각에 소름이 돋았다. 그때 노동조합 소식지에 국정원 직원과의 접촉을 자제해달라는 글을 띄웠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로 아득한 옛날얘기가 돼버렸지만 해리 해리스 주한 미국대사의 말이 잠시 화제였다. “한국이 제재를 촉발할 수 있는 오해를 피하려면 남북협력을 위한 어떤 계획도 미국과의 워킹그룹을 통해 논의하는 게 좋을 것이다.” 새해 문재인 대통령이 내놓은 남북협력 추진 구상에 내놓은 훈수였다. ‘협의’란 미국의 직인 없인 어떤 서류도 통과시켜줄 수 없다는 경고였다. “그(문재인 대통령의) 낙관주의에 따른 행동은 미국과 협의해야 한다.” 이쯤 하면 식민지 총독이 떠오를 만하다.
지난해 11월 알려진 또 다른 에피소드. 국회 정보위원장을 맡은 이혜훈 새로운보수당 의원이 해리스 대사를 만났을 때다. “50억달러(약 6조원)라는 단어만 20번 정도 들은 것 같다.” 인사 나누는 자리로 알고 가볍게 (대사 관저에) 갔더니 미국대사가 서론도 없이 방위비분담금 얘기를 반복적으로 꺼내 불쾌했다고 한다.
사실 내 눈을 사로잡은 건 한국을 얕잡아보고 구설을 즐기는 듯한 그의 문제적 발언이 아니다. 방위비분담금 협상으로 두 나라가 치열한 신경전을 벌일 때 그와 만났다는 인사들의 면면이었다. 정보위원장만이 아니라 국회의 외교통일위원장, 산업통상자원중소벤처기업위원장, 국방위 간사…. 공개된 것만 그렇다.
불편한 느낌은 그가 일본계여서, 조선총독을 연상시키는 콧수염을 길러서, 외교 불문율을 깨는 발언을 해서가 아니다. 그저 우리 현실이 안타까워서다. 내로라하는 높은 사람들이 미국대사를 만나 너나 할 것 없이 얼마나 많은 속내를 드러냈을까. 미국이 동맹국이지만 방위비분담금이나 한-일 군사정보보호협정(지소미아) 등에서 우리와 이해충돌이 잦은 건 엄연하다. 남북관계에서도 마찬가지다.
2011년 내부고발 사이트 위키리크스는 주한 미국대사관이 본국에 보낸 외교 전문을 공개했다. 우리 정부와 국회 실세들이 미국대사와 밀실에서 주고받은 얘기는 충격적이다. 이명박 전 대통령의 친형 이상득 전 의원이 미국대사에게 했다는 말은 편린이다. “이명박 대통령은 뼛속까지 친미·친일이니 그의 시각에 대해선 의심할 필요가 없다.” 우리 국민 누구도 듣지도 보지도 못했던, 누군가의 뼛속 상태가 미국에는 전달됐다.
잠시 뜸했지만 그때나 지금이나 미국대사관을 부지런히 드나들며 건네는 높은 분들의 은밀한 속삭임은 계속된다. 어쩌면 미국은 우리 국민보다 우리 정부의 내밀한 사정을 더 잘 아는지 모른다. 위키리크스의 교훈은 벌써 잊혔는지 모르겠다.
류이근 편집장 ryuyigeun@hani.co.kr한겨레21 인기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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