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등학생 때였다. 쉬는 시간 화장실은 담배 연기로 자욱하곤 했다. 친구들의 대담함에 놀라기도 했지만, 역겹기도 했다. 환풍기를 돌려도 잘 빠지지 않는 뿌연 연기, 매캐한 냄새는 고역이었다. 그 시절 그리 청결하지 않은 화장실은 고통지수를 더했다.
어느 날 화장실에서 연기가 사라졌다. 검은 연기가 피어오르는 쓰레기 소각장 한쪽에 흡연실이 만들어졌다. 담배 피우지 않는 학생을 위한 배려인지, 어차피 끊게 할 수 없는 담배를 숨지 말고 당당히 피우라는 건지, 양성화하되 금연 교육을 강화해 흡연을 줄이겠다는 계산인지, 끝내 영문을 모른 채 졸업했다. 30년이 지나 다시 생각해봐도 믿기 어려운 일이다. 그런 ‘불순한 실험’을 한 학교는 이전에도 없겠지만, 이후에도 없을 게다. 자율 흡연은 학교 담장 옆을 지나다 수상한 낌새를 챈 주민의 민원에 오래가지 못했다.
고등학교 2학년 때 자율학습을 할지 말지 설문조사를 벌였다. 반대가 많자 시행하지 않았다. 학교 옆 초등학생들과 비슷한 시간에 하교했다. 교복 자율화 세대인데 학생들한테 의견을 물은 뒤 교복을 입지 않는 결정도 내렸다. 학생들의 선택과 자율성 존중은 87년 민주화 항쟁 직후 교정에까지 스며든 시대정신의 영향이 컸다. 미화할 의도는 없다. 당시에도 학교에 폭력적인 교사와 민주적인 교사가 공존했다. 학생을 짓밟는 선생님도 있었고, 피를 토하며 독재를 비판하는 선생님도 있었다. 학내 문제는 교문을 벗어나지 않은 채 논의되고 결정됐다. 때론 존중받았지만 때론 무시받았다. 측정할 수 없겠으나, 또래들은 졸업 뒤 대개 건강한 시민으로 자랐다.
서울 관악산 자락은 고려시대 귀주대첩으로 유명한 강감찬 장군이 태어난 곳이다. 그의 시호를 따와 이름 지은 인헌고의 경영관은 “민주적 학교 운영으로 교육력을 신장시키고 학생들의 개성과 다양성을 존중하는 개방적이고 창의적인 교육”이다. 어느 학교보다 학생들의 선택권과 자율성을 존중할 것 같은 이 서울형혁신학교에서 ‘끔찍한 사상 주입’을 한다는 말이 퍼졌다. 의 첫 보도에 이은 ‘인헌고 학생수호연합’의 10월23일 기자회견으로 전국적인 주목을 받았다. “학생은 정치적 노리개가 아니다”라는 자극적인 펼침막이 내걸렸다.
학생수호연합 대표와 대변인이라고 밝힌 두 학생이 회견에 나섰다. 교문 앞에 진 친 보수단체 회원 100명이 구호와 박수로 응원했다. 두 학생은 교사의 끔찍한 사상 독재의 사례로 ‘반일 구호를 외치게 했다’ ‘한 학생에게 일베 아니냐고 물었다’ ‘무고한 조국을 사악한 검찰이 사퇴시켰다는 취지로 말했다’ ‘마라톤 대회에서 반일 문구를 몸에 붙이고 뛰라고 했다’를 제시했다. 실명까지 걸고 한 이들의 주장은 무턱대고 무시해선 곤란하지만, 수상쩍은 대목이 많다. 두 학생은 대한민국 전체 학생을 대표하듯 자신들이 직간접적으로 알게 된 학교 내 사례를 “우리나라 교육은 특정 정치세력 교사에 의해 장악됐다. 초·중·고 다 마찬가지다”라고 쉽게 확장한다. 이런 내용을 담아 시국선언문을 읽는 듯한 솜씨에선 순수성이 의심된다. 기자회견에 나선 2명뿐만 아니라 150명이 서울시교육청에 감사 착수를 요청하는 청원서를 제출했다고 했으나, 알고 보니 소수 우익단체였다. 교육청의 조사 결과로 곧 시시비비가 가려질 것이다.
사상의 자유를 요구한다는 두 학생의 주장은 교내에서 정화되지 않은 채 학교 담장을 넘어 어른들의 정치적 의도와 왜곡, 과장이 빠르게 보태졌다. 보수 언론과 단체, 정당의 지지와 호응을 받으면서 전국교직원노동조합 규탄 시위와 정치 편향 교육 논란 등으로 번졌다. 10월30일 인헌고 학생 256명은 선생님들이 빠진 채 토론회를 열었다. 사상 주입이나 교사들의 정치적 강요는 없었단다. 이 밖에 학생 다수가 증언하는 사실은 학생수호연합의 주장과 배치됐고, 인헌고 담장 밖에서 정치화하려는 어른들의 기대에도 벗어났다. 학교 담장 안에서 제때 제대로 해결되지 못한 게 아쉽다.
류이근 편집장 ryuyigeun@hani.co.kr한겨레21 인기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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