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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장이 또다시 마른 빨래처럼 말할지라도

등록 2019-07-17 10:35 수정 2020-05-03 04:29

“팀장 회의에서 기록으로 남겨야 한다는 의견이 많이 나왔습니다. 이번호 표지는 예정된 기사 대신 판문점 회동으로 가죠.”

뭔가 중요한 결정을 할 때 편집장의 목소리는 햇볕에 바짝 마른 빨래처럼 건조하고 빳빳하다. 나는 그때마다 아주 가끔 그가 원망스럽다. 물기 없는 그의 목소리는 보통 ‘힘든 한 주’를 예고하는 신호이기 때문이다. (편집장에게도 물론 힘든 한 주이지만….) 7월1일 오후 편집장의 목소리도 그랬다. 남·북·미 판문점 회동이 역사적인 사건이지만 열흘 뒤 독자 손에 들어갈 잡지에 ‘읽을 만한’ 기사를 담는다는 것은 주간지 기자에게 늘 난감한 일이다. 역사적인 일이라 더 그랬다. 6월30일부터 수많은 언론에서 수많은 보도를 ‘역사적으로’ 쏟아내며 독자들의 눈을 사로잡고 있었다. 다른 보도와 차별되면서도 깊이 있는 시각을 담아야 하는 주간지 기자의 숙명이 어깨를 눌렀다. (판문점 회동 중계를 보며 설레던 마음은 어디로 가고, 인간이란 동물은….)

‘기록’이라는 말이 머릿속을 맴돌았다. 한반도 평화의 시계가 다시 돌아간다는 기쁨에 모두가 들뜬 상황에서 한발 물러서 차분한 태도를 유지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기록이란 건조하고 빳빳해야 하니까.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 문재인 대통령 세 사람 각각에 집중해 이들을 판문점 군사분계선으로 이끈 힘의 원천과, 그 힘이 어디까지 이들을 밀어올리지 입체적으로 다루기로 동료들과 의견을 모았다.

트럼프 대통령의 ‘뇌 구조’를 엿본다는 정의길 국제부 선임기자, 남북관계 전문가인 권혁철 한겨레평화연구소장, 평화운동에 오래 매진해온 정욱식 평화네트워크 대표를 외부 필진으로 섭외했다. 전정윤 사회팀장, 이재호 기자도 힘을 보탰다. 고민 끝에 트럼프 대통령과 김 위원장이 악수를 나눌 때 미소를 띠며 지켜보는 문 대통령이 담긴 사진을 제1269호 ‘얼굴’(표지 이미지)로 정했다. 판문점 회동을 가장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장면이었다. 이 장면에 어울릴 표지 문구를 여러 개 넣어봤지만 어느 하나 구성원들을 만족시키지 못했다. 한두 문장으로 규정할 수 없는 사건이었다. 제1269호는 ‘기록’이다. 구둘래 편집팀장이 고심하며 만들어온 문장을 과감히 버리고 ‘2019.6.30. 판문점’이라는 건조한 글귀만 표지에 박아넣었다. 기록이 완성됐다.

‘우발적인 전진’(트럼프 대통령), ‘자존심은 남기고 앞으로’(김 위원장), ‘여전한 미답의 길’(문 대통령). 이 세 사람 기사에 붙인 제목은 판문점 회동이 보름 넘게 지난 지금도 유효하다. 문 대통령 말대로 똑바로 나아갈 때도 있지만 구불구불 돌아갈 때도 있고, 때로는 멈추기도, 후퇴할 때도 있을 것이다. 중요한 건 세 사람이 ‘미답의 길 앞으로 전진’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번 판문점 회동처럼 갑작스레 한반도 평화를 앞당기는 역사적인 사건을 또 기록해야 할지 모른다. (그때는 편집장의 목소리를 기쁘게 받아들여야지.)

이승준 기자 gamja@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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