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바로가기

한겨레21

기사 공유 및 설정

하이패스와 수납원

편집장의 편지
등록 2019-07-09 02:00 수정 2020-05-02 19:29

두 살 터울 동생이 중국 현지 법인에 파견 나가기 전 이것저것 넘겨주고 떠났다. 앵무새와 새장, 벽걸이 티브이, 검정색 하이패스 단말기…. 여름철 대가족이 모여 여행 다닐 때면 내 차는 늘 꼴찌였다. 아버지와 형, 동생 차는 하이패스 전용차로로 톨게이트(요금소)를 미끄러지듯 빠져나갔지만 나는 꼭 줄을 섰다. 밀리면 10분 이상 늦는다. 앞서 목적지에 도착한 아버지한테 그때마다 핀잔을 듣는다. 이제 좀 하이패스 단말기를 달라고.

4년 뒤 동생이 돌아왔을 때, 하이패스 단말기는 우리 집 벽걸이 티브이 밑 수납장에 그대로 처박혀 있었다. 내 차는 지금도 현금이라고 쓰인 차선을 따라 톨게이트를 지난다. 집에서 그리 멀지 않은 외곽순환고속도로 구리 톨게이트를 지나려면 800원을 내야 하는데 언제부터인가 현금 대신 교통카드로 결제할 수 있어 수납원이 내미는 손을 신경 쓰지 않은 채 단말기에 찍고 잽싸게 지나친다. 곧 수납원이 하나둘 밀려나겠구나란 생각이 문득 들곤 했다. 하이패스 단말기가 있으면서도 차에 달지 않은 건 게으름에 겹쳐 그런 현실을 더 빨리 마주할까 두려워서다. “감사합니다” “수고하세요” 그 짧은 한마디나마 주고받을 사람이 아예 사라질까봐.

누군 성당에 누군 교회에 누군 절에, 누군 산과 바다로 일상의 쉼표를 찾아 떠나는 일요일이었던 지난 6월 마지막 날, 마흔한 명의 톨게이트 수납 노동자가 서울 톨게이트 옥상에 올라갔다는 소식을 듣는 순간 하이패스가 떠올랐다. 좁은 난간에 서서 날마다 20만 대의 차량이 통과하면서 뿜어내는 매연을 코와 입으로 들이마시며 외친다. “해고는 살인이다” “직접고용 쟁취 투쟁” “허울뿐인 정규직화 1500(명) 집단 해고” “불법파견 인정하고 직접고용 즉시 이행하라”…. 이들의 절규를 담은 작은 펼침막들은 한국도로공사가 내건 더 큰 펼침막 구호 “7월1일 한국도로공사서비스(주) 출범”에 가린다. 공사는 수납 노동자를 직접 고용하는 대신 이 자회사에 몰아넣을 계획이다. 하지만 ‘무늬만 정규직’이라며 이를 받아들일 수 없는 수납원 수백 명이 지금 서울 톨게이트와 청와대 앞에서 시위한다.

하이패스에 노동자들이 밀려날 수밖에 없는 걸까. 200년 전 양털 깎는 기계가 나왔을 때 일자리를 잃은 노동자들이 기계를 불태웠던 러다이트운동처럼 저항해봤자 끝내는 기계에 밀려날 운명이란 생각이 들었다. 잠시 착각했다. 하이패스가 시범 실시를 거쳐 전국 영업소에서 전면 개통한 건 2007년 말이다. 수납원이 대량으로 밀려난 건 하이패스 시행 전이다. 도로공사에서 수납원을 직접 고용하기 시작한 건 IMF 외환위기 직전부터다. 새로 문을 여는 톨게이트에서 일하는 수납원들은 용역업체 계약직으로 채용됐다. 수납원의 비정규직화는 외환위기 이후 속도를 내더니 이명박 정부 때 완성됐다. 업체 사장님들은 주로 도로공사 퇴직자였다. 수납원이 비정규직이 된 건 자본의 이익 극대화를 위한 선택이자 이를 거든 정치적 의지의 합작품이었다. 하이패스는 핑계지 주범이 아니었다.

지난해 도로공사의 직원 수는 6324명(무기계약직 1349명 포함)이었다. 남성이 대부분이다. 용역 형태의 민간 사업자 인력이 무려 8384명에 이른다. 공사를 위해 일하는 노동자가 직접고용보다 파견이 많은 기형적 구조다. 소속 외 인력 중 수납원만 6700여 명이다. 거의 다 여성이다. 보수는 또 어떨까? 1인당 평균 보수는 정규직 약 8천만원, 무기계약직 약 5천만원이다. 용역업체 계약직 수납원은 2천만원 안팎이다. 힘들면 세금을 붓는 공공기관이라는 곳에서 고용 형태에 따라 노동자 임금은 철저하게 계급화돼 있다.

주말에 서울톨게이트를 지나 시골에 내려간다. 수납원들의 파업에 연대하는 표시로 이번에도 현금 결제 차로를 이용해야겠다. 하이패스만 탓했던 것을 반성하면서.

류이근 편집장 ryuyigeun@hani.co.kr*이번호에 예정됐던 ‘공장이 떠난 도시-울산 동구 편’은 표지 교체로 다음호에 싣습니다. 독자 여러분께 약속을 지키지 못해 죄송합니다.



독자 퍼스트 언론, 정기구독으로 응원하기!


전화신청▶ 1566-9595 (월납 가능)
인터넷신청▶ http://bit.ly/1HZ0DmD
카톡 선물하기▶ http://bit.ly/1UELpok


한겨레는 타협하지 않겠습니다
진실을 응원해 주세요
맨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