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동안 사무실 한켠에 바퀴 달린 파란색과 남색 여행가방 두 개가 놓였다. 빨랫감과 세면도구, 서류 뭉치, 책이 잔뜩 든 가방의 두 주인은 금요일 저녁 즈음 전북 군산에서 그리고 울산에서 서울 공덕동 한겨레신문사로 출근한다. 이 시각 동료들은 퇴근해, 사무실은 한적하다. 다음호에 뭘 쓸지 토론하는 오후 2시 회의를 마치면 참석자들은 하나둘 일터를 떠난다. 대개 목요일 아침부터 시작한 마감이 이튿날 새벽까지 이어지기 일쑤여서, 장시간 노동에 지친 기자들은 금요일 오후 회의까지 마치면 탈진 상태다.
그렇다고 금요일 저녁에야 사무실에 나오는 여행가방 주인들이 생생한 건 아니다. 먼 데서 온데다 장기 지방 출장으로 피로가 쌓였다. 반기는 건 고작 편집장이지만, 그마저도 회의를 하자거나 저녁을 먹으면서 은근 일 얘기뿐이니 두 사람에게는 그리 반가운 존재가 아니다. 주말을 보내고 두 기자는 다시 열차를 타고 군산으로, 울산으로 내려간다. 그렇게 6주가 흘렀다.
후원제 시작을 알리는 표지이야기 마감에 쫓겨 눈알은 튀어나올 것 같고 정신은 산란한 어느 봄날 오후였다. 출판면에 들어갈 ‘21이 찜한 새 책’에 소개된 책 한 권이 눈에 들어왔다. 였다. “미국 위스콘신주 제인스빌에선 2008년 자동차회사 GM 공장이 폐쇄됐다. 지역경제가 휘청이고 중산층 가장 5천여 명이 실업자가 됐다. 책은 제조업 도시 제인스빌에서 GM 공장이 폐쇄된 뒤 벌어지는 좌절과 희망의 여정을 기록했다.” 이 짧고 건조한 문장의 기사로 책이 요약됐지만, 이거다 싶었다.
파란 가방의 주인은 방준호 기자다. 박근혜·최순실 게이트를 열어젖힌 주인공 중 하나다. 한국판 를 보고 싶다는 생각을 한 지 2주 뒤 그가 한겨레신문 경제팀에서 로 왔다. 4월 첫 주부터 속은 깊고 말은 없는 그를 ‘공장이 떠난 도시’ 프로젝트로 빠르게 밀어넣었다. ‘공장이 떠난 도시에서’는 책 의 부제이기도 하다.
남색 가방의 주인은 조윤영 기자다. 에 와 노동 전문기자를 꿈꾸며 ‘아무나 노조-노조인 듯 노조 아닌 노조 같은 노조들’(제1253호), ‘2년 전 그날 이후-사고 목격 피해 트라우마’(제1258호) 표지이야기를 쓴 조 기자가 2주 뒤 프로젝트에 합류했다. 겸손한 그는 취재 현장에선 흡사 디젤기관차다.
3주 동안 사전 취재를 마친 두 기자는 4월22일부터 5월 말까지 두 도시로 내려갔다. 어떻게 기사를 써야 할지 기획안을 짜고 기사를 써내려가는 데 3주의 시간이 더 필요했다. ‘공장이 떠난 도시’ 군산 편과 울산 동구 편은 그렇게 석 달의 숙성을 거쳐 이번호와 다음호에 실린다. GM이 떠난 군산, 현대중공업이 휘청이는 울산 동구는 공장에 의지해 사는 많은 도시의 과거·현재·미래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2년 전 금융위원회를 출입할 때다. 정부에서 대우조선에 2조9천억원을 지원한다는 기사를 쓴 적 있다. 4조2천억원을 지원한 지 1년 반 만에 이뤄진 추가 지원인데다 업계 미래가 어두운 상황이어서 비판적 관점으로 다뤘다. 기자실 책상머리에 앉아 주로 정부 발표를 갖고서 쓴 탓인지 뒷맛이 개운치 않았다. 현장은 언감생심이었다. 다시 더듬어보니 협력사를 포함하면 3만5천 명의 노동자, 그들의 가족을 더하면 10만 명 넘는 이의 삶의 터전인 옥포조선소의 운명을 논하는 기사치곤 너무 가벼웠다. 변명에 불과하지만, 다들 그렇게 썼다. 올해 초 가 나왔다는 소식을 듣고선 뜨끔했다. 기자가 썼어야 할 책인데….
뒤늦게나마 방 기자와 조 기자가 쓰는 ‘공장이 떠난 도시’는 한국판 이자, 군산과 울산 동구 편 다. 두 고용 위기 지역에 뿌리를 둔 수십만 명의 삶을 다룬 기록이다. 이슈에 접근하는 입체적 방식과 르포르타주 방식의 기사 쓰기, 원고지 200장 안팎 중편소설 분량의 단일 기사, 만화를 곁들인 파격적 편집 등 내용과 형식에서 언론의 기존 기사와 다르다.
독자를 위한 의 또 하나의 실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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