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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급병가 없는 나라

편집장의 편지
등록 2019-05-07 12:19 수정 2020-05-03 04:29

회사 생활을 시작한 지 19년째다. 아픈 적은 많았으나, 며칠씩 쉬어야 할 만큼 앓은 적은 없다. 잘릴까봐 찍힐까봐 아픈 몸을 이끌고 억지로 출근해야 하는 회사는 아니었다. 제 몸보다 일과 회사를 더 챙기는 인상을 동료들한테 보여주고 싶어 그랬는지 아파도 웬만하면 회사를 나왔다. 마늘주사를 맞을 때도 출근해 회사 근처 가정의학과의원을 찾아갔다. 불가피하게 회사에 나올 수 없을 때는 연차휴가를 썼다. 그것도 고마웠다.

나름 노조에 1년 동안 있었다. 여느 회사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안식휴가를 늘리고 노동자의 쉴 권리를 외쳤지만, 부끄럽게도 업무 외 부상이나 질병으로 쉴 때 쓸 수 있는 병가엔 무심했다. 한 동료 덕에 최근에야 사규에 병가가 어떻게 규정돼 있는지 살펴봤다.

드물게 한겨레신문사는 병가를 유급휴가로 지정하고 있다. 아파도 눈치 보면서 쉬어야 하는 회사가 태반인 나라에서 법적 의무도 아닌 병가를 사규에 박아넣고 돈까지 주는 회사는 거의 없다. 비교적 노동권이 잘 보장된 한겨레신문사에서는 병가가 유급이긴 하지만 제한적이다. 노동자가 휴일을 포함해 한 주 이상 출근이 어려울 때 한 달까지만 병가를 쓸 수 있다. 그 뒤 휴직할 수 있지만 무급이다.

정확한 통계는 없지만 종사자 10명 이상인 회사에서 유급병가를 주는 곳은 대략 100개 중 7개에 불과하다. 실태는 알 수 없고 그나마 사규로 추정해본 현실이다. 노동환경이 훨씬 열악한 10명 이하 회사로 범위를 넓히면, 그 비율은 더 낮아진다. 아파도 참고 출근하는 직장인의 모습은 오랜 미덕이었고, 여전히 칭송되는 나라에서 당연한 수치인지 모른다. 우리나라처럼 병가를 법으로 보장하지 않고, 병가가 있더라도 돈을 주지 않는 나라는 드물다.

세계 최장 노동시간을 자랑하는 나라가 아픈 노동자의 쉴 권리 보장에 가장 인색한 건 동전의 양면이다. 쉬기 어려우니 일하는 시간은 늘어난다. 유급병가 없는 나라란 딱지는 낮은 노조조직률, 노동권 보장의 짧은 역사, 위계질서가 강한 조직문화 등 여러 배경이 낳은 결과다. 그 바닥에는 너도나도 병가를 쓰면 생산성이 떨어지고 비용이 크게 늘어날 것이란 자본의 논리가 오랫동안 작동해왔다.

이 낡은 주문을 수정해야 할 때다. 선진국 대부분이 유급병가를 시행하고 있기 때문만은 아니다. 먼저 생산성을 따져보자. 아픈 노동자가 쉬었을 때보다 일터에 나왔을 때 생산성 손실이 3배나 크다고 한다. 유급병가로 인한 1인당 지출액이 많은 나라는 노동생산성도 높다는 연구가 있다. 유급병가를 도입하면 국가나 기업의 비용 부담이 늘어나는 건 사실이지만, 노동자 임금이 깎이지 않으면서 가계에서 쓸 수 있는 돈이 늘어난다. 덕분에 민간 소비 증가 효과도 있다.

되레 아픈데도 출근했을 때 치러야 할 사회적 비용이 병가를 맘껏 썼을 때보다 클 수 있다. 2009년 미국에서 신종 인플루엔자A(H1N1)가 번졌을 때 많은 노동자가 아픈 몸을 이끌고 회사에 나왔다. 유급병가가 보장되지 않는 상황에서 독감에 걸렸다고 쉬었다가 급여 삭감뿐만 아니라 자칫 일자리까지 잃을 수 있다는 두려움이 컸다. 그 결과는 질병의 확산이었다. 700만 명이 일터에서 인플루엔자에 전염됐다고 하니 유급병가가 없어서 치른 공동체의 비용은 어마어마하다.

아플 때 눈치 보지 않고 병가를 쓸 수 있어야 한다. 이를 뒷받침하는 법적 장치가 마련돼야 한다. 쉴 동안 임금도 보전돼야 한다. 돈까지 주면 가짜 병가가 넘칠 수 있다고? 설령 꾀병으로 지출해야 하는 비용이 늘더라도 우리 사회가 얻는 게 더 클 것이다. 그래서 유급병가는 사회보장제도 관점에서 접근해야 한다. 노동자와 자본가, 두 당사자의 문제만은 아니다. 우리 모두의 문제이면서도 낯선 이야기를 지금부터 서보미 기자가 들려준다.

류이근 편집장 ryuyigeu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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