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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년의 딜레마

편집장의 편지
등록 2018-09-15 12:58 수정 2020-05-03 04:29

소년은 어릴 적 종종 사냥을 했다. 눈이 많이 쌓인 산비탈 위에서 아래로 몰면 뒷다리가 긴 산토끼를 잡기 쉽다는 동네 형들의 말을 믿고 집을 나섰다. 대나무로 만든 활도 둘러멨다. 화살도 챙겼다. 집 옆 제실 대문을 과녁 삼아 연습한 덕에 활쏘기에도 자신감이 붙었다. 토끼를 쫓다가 결정적 순간에 활을 쏠 계획이었다. 화살촉에 못도 박아 단단히 고정했다. 소년은 매번 토끼를 구경도 못한 채 눈 쌓인 산속을 헤매다 내려왔다. 실망한 소년에게 형들이 다시 말했다. 철사로 올무를 만들어 토끼가 다니는 길에 놔보라고 했다. 대여섯 개를 만들어 토끼똥이 있거나 토끼가 다니는 길로 보이는 곳에 설치했다.

그날 밤부터 올무에 걸린 토끼를 상상하면 흐뭇했다. 밥상에 자신이 잡은 토끼 고기가 올라올지 모른다는 생각은 작은 가슴을 뛰게 했다. 가끔 아버지가 꿩이나 산비둘기, 산토끼를 ‘주워’왔다. 추워서 얼어 죽거나 농약을 먹고 죽은 것, 엽총을 가진 동네 아저씨가 사냥한 걸 얻어온 것이었다. 소년은 아버지도 못한 일을 해낼지 모른다는 마음에 우쭐했다. 며칠 뒤 산에 올랐다. 설치된 철사 올무에 걸린 토끼는 한 마리도 없었다.

사실 소년은 고기를 좋아하지 않았다. ‘전빵’을 하는 이장댁에서 마을에서 키운 돼지를 가끔 잡았다. 온 동네 떠나갈 듯한 돼지 멱따는 소리는 소년의 머릿속에 지워지지 않는 메아리다. 김이 모락모락 나는 돼지의 간을 소금 찍어 소주와 함께 입에 넣는 아저씨들을 보며 생명, 고기, 잔혹함이 정리되지 않은 채 뒤엉켰다. 아버지는 그때마다 고기 한 덩어리를 당신 몫으로 사와서 광 입구에 끈으로 꿰 걸어놨다. 삼겹살이 없던 그때, 고기는 주로 김치찌개나 고추장볶음으로 식탁에 올라왔다.

고기는 산에서 수렵되거나 옆집에서 기른 동물이었다. 고기를 얻고 소비하는 과정은 소년의 동네 안에서 이뤄졌다. 소년은 중학교 2학년이 되면서부터 읍내로 나와 자취를 시작했다. 동네를 떠난 뒤 고기는 정육점에서 사왔다. 누가 키우고 잡았는지 알 수 없는 고기였다. 어느 때부터 시골에서도 더 이상 돼지를 잡지 않았다. 읍내로 나와 고기를 사갔다. 소년이 태어났을 때 1인당 돼지고기 소비량은 1.2㎏이었으나, 어른이 된 지금은 그 열 배에 이른다.

어른이 된 소년은 더 많은 고기를 더 자주 먹는다. ‘잡식 소년’은 딜레마에 빠졌다. 어릴 적 동네에서 흔히 볼 수 있던 돼지 움막이 사라진 자리를 공장이나 다름없는 농장이 차지했다. 더 많은 이윤을 추구하려는 자본은 고기의 대량생산에 효율성을 최우선시한다. 제러미 리프킨이 에서 소(cattle)의 어원을 동산(chattel)과 자본(capital)의 합성에서 유래된 것으로 풀이했는데, 밀집 사육되는 ‘돼지공장’의 현실도 자본을 떠오르게 한다. 자본은 더 좁은 곳에서 더 많은 돼지를 생산한다.

읍내에서 소년의 시골 마을로 들어가는 길 왼편에 오래전 작은 ‘돼지농장’이 들어섰다. 주민들의 반대가 거셌지만, 막기에는 역부족이었다. 도로 건너편 그곳을 지날 때마다 똥 냄새가 난다. 대가 없는 이윤은 없다. 마이클 폴란은 에서 “예전의 농장에서는 낭비되는 것이라고는 정말로 하나도 없었다. 동물의 배설물은 비료로 들판에 뿌려졌다. 그러나 집중가축사육시설에서 나오는 오물은 매우 강한 독성 오염물질이 되었다. 수천 톤의 동물 배설물은 딱히 처리할 만한 좋은 방법 없이 그대로 쌓여가고만 있다. 사육장은 또한 새롭고 치명적인 세균의 온상이기도 하다. …이로 인해 소의 건강에, 땅의 건강에, 궁극적으로 그들을 먹는 우리 인간의 건강에 상당한 비용이 야기되고 있다”고 말한다. 소 대신 돼지로 바꾸면 딱 우리 얘기다.

보이지 않는 곳 돼지의 고통은 외면된다. 소년도 모른 척한다. 동물복지 상표 앞에서 더 싼 고기에 손이 간다. 소년은 기껏 자신의 딸들에게 수입돈 대신 한돈을 먹이면서 ‘더 나은 선택’을 했다고 자부한다. ‘잡식동물’로 남은 소년은 딜레마에서 벗어날 수 없는 걸까.

류이근 편집장 ryuyigeu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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