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 때 봤던 책 가운데 아직 버리지 못한 책 한 권이 있다. 장호순이 쓴 (개마고원 펴냄)다. 이 책에서 얼 워런 미국 연방대법원장의 이름을 처음 보았다. 미국이 부러웠다. 우리나라에도 이런 법관 한 명 있었으면….
그가 이끌던 연방대법원은 1957년 ‘예이츠 사건’ 판결에서 반국가단체 조직 혐의로 기소된 공산당 간부들에게 무죄를 선고했다. 매카시즘 광풍으로 얼어붙은 사상과 표현의 자유에 온기를 불어넣은 역사적 판결이었다. ‘즉각적인 폭력혁명을 기도하거나 선동하는 것’이 아니라면 처벌할 수 없다는 판례를 남겼다. 예이츠 판결 뒤 반공주의자들이 우려한 공산당의 세 확장은 없었다. 유권자의 표를 받지 못한 공산당은 자연스레 소멸했다.
기자가 되고 나서 서초동을 출입할 때였다. 눈을 씻고 찾아봤지만 한국의 워런은 보이지 않았다. 대법관은 그저 가장 높은 자리에 오른 법관일 뿐이었다. 당시 잘나가던 어느 법관은 제일 존경하는 판사가 이회창이라고 했다. 똑똑해서, 또 대쪽이어서 그렇단다. 이회창은 한나라당 총재이자 대선 후보로 나선 정치인이었다.
그즈음 처음 만난 김이수는 서울고법 부장판사였다. 출입처를 옮기는 내게 책을 한 권 건넸다. 이다. 독일 문학비평가 마르셀 라이히라니츠키의 자서전이었다. 문학에 흥미가 없던 나는 500쪽 넘는 책에 손을 대지 못했다. 서재를 정리하면서 몇 번을 버릴까 고민하다, 선물이란 이유로 처분을 유예했다. 유대인이었던 라이히는 나치 독일군한테서 자신을 구해준 ‘붉은 군대’ 덕택에 1945년 자발적으로 공산당에 가입했다.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에 넋을 잃은 이 지식인에게 공산주의는 ‘매력적인 이념’이었다. 불과 4년 만에 ‘사상적 거리감’을 보였다는 이유로 당에서 쫓겨난 그는 공산당 가입이 ‘심각한 실수’였다고 회상했다. 그러면서도 “공산당원이었던 덕에 놓치고 싶지 않은 경험을 했다”고 고백했다.
서초동을 떠나 여의도에서 2004년 정치부 기자를 할 때였다. 그해 10월 헌법재판소는 행정수도 이전이 헌법에 어긋난다는 결정을 내렸다. 수도가 서울이란 오랜 ‘관습헌법’에 위배된다는 논리였다. 생중계를 지켜보다 ‘관습’이란 말에 피식 웃음이 나왔다. 짧지만 2년 반 법조 출입을 했던 내게 헌재 결정은 그리 놀랄 일은 아니었다. 존재감도 신뢰도 크지 않았다. 대법관에 오르지 못한 ‘두 번째 높은 법관들’이 내린 또 하나의 이상한 결정으로 치부했다. 당시까지도 헌재는 대법원 아래란 인식이 지배적이었다. 능력 있는 엘리트 판사가 헌법재판관이 되면 기자들은 “대법관이 되어야 할 분인데”라며 위로를 건네던 때였다.
최고위 2등 재판관들의 황당한 논리로 뒷받침된 결정이 있은 지 10년 뒤 헌재가 다시 세상의 중심에 섰다. 그새 헌재의 위상은 한층 높아졌다. 2014년 12월19일 헌법재판관 9명 가운데 8명이 통합진보당 해산 결정에 한목소리를 냈다. 이석기와 통진당이 ‘밉다’는 여론과 일치한 결정이었지만, 헌재에 ‘영원한 오점’으로 남을지 모를 결정이었다. 이때 유일한 반대자가 김이수 재판관이었다. 그의 반대의견은 헌재 결정문 346쪽의 절반이 넘는 182쪽에 이른다. 그는 정당해산 결정은 “정당으로 인한 위험성이 우리 사회의 민주주의에 급박하고 중대한 위협으로 부상한 때에만 최후적이고 보충적으로 선고되어야 한다”고 썼다. 그렇지 않다면 선거를 통해서 정치적 심판을 받으면 된다는 원칙을 제시했다.
한때 자신을 매료시켰던 문학비평가 라이히를 통해서 김이수가 공산주의 이념을 어떻게 사유했는지 나는 모른다. 다만 그는 분단과 전쟁 뒤 한국 사회를 지배해온 반공 이데올로기가 손쉽게 북한과의 연계성이란 혐의를 덧씌워 진보 정당 입지를 축소해왔던 아픈 역사의 반복을 경계했다. 그의 ‘소수의견’은 훗날 ‘위대한 의견’으로 기록되리라. 9월 퇴임하는 그에게서 대학 때 부러워했던 워런을 떠올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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