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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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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살과 저항

등록 2017-10-24 14:42 수정 2020-05-03 04:28

‘김용식을 아시나요?’

이 질문은 ‘철수나 영희는 아시나요’라는 물음만큼 어리석은 일일 것입니다. 다소 ‘올드’한 느낌이 나는 김용식이라는 이름은 분명, 우리 주변에서 흔히 만날 수 있는 장삼이사의 이름입니다. 아침에 타고 온 만원 지하철 안에서 미친 척하고 “용식아!”라고 외친다면, 스마트폰으로 열심히 축구 중계를 보고 있던 중년의 사내 두세 명이 자기를 부르는가 하며 두리번거릴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저는 김용식이라는 이름을 보면, 묘한 피 냄새가 떠오릅니다. “전북경찰국 제18전투대대 3중대 지휘관이던 김용식은 1951년 5월10일 전북 고창군 무장면 월림리에서 2㎞ 떨어진 도곡리 시목동 옆 계곡과 봉암산 계곡에서 공비 토벌의 임무를 갖고 있던 마을 주민 89명을 집단 총살”했습니다. 이 인용구는 제가 지어낸 것이 아니라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가 정리한 2007년 하반기 조사보고서에 나오는 문장입니다.

김용식이 저지른 이 학살은 여느 사건과 다른 중요한 특징이 있습니다. 보통 한국전쟁 시절 군경에 의한 집단학살 사건에 대해선 진실·화해위가 “진실이 규명됐다”는 결정을 내린 뒤 △국가의 사과 △피해자와 유가족을 위한 명예회복 조처 등 권고 사항을 첨부합니다. 그러나 이 사건은 유일하게 “국가가 사과를 해야 한다”는 권고가 없습니다. 한국전쟁기에 이뤄진 성씨 간의 갈등이 이념적 대립으로 격화되면서, 김용식이 사적인 보복에 공권력을 동원해 민간인들을 학살한 사건이기 때문입니다.

김용식은 피에 굶주린 살인마였을까요? 아닙니다. 김용식이 학살을 저지르기 일곱 달 전, 1950년 10월 고창군 무장면 월림리 용전마을에서 지방 좌익과 죽립마을 천씨들이 김용식의 일가 53명을 살해했습니다. 숨진 이들 가운데는 당시 65살이던 김용식의 모친 이연순, 25살이던 아내 양계화, 6살과 2살이던 두 딸 일순과 차녀도 포함돼 있었습니다. 즉, 김용식의 학살은 자기 가족이 처참하게 희생된 사실에 대한 ‘사적 복수’였던 것이죠. 5∼6년 전쯤 희생된 김용식의 가족 명단을 표로 정리한 진실·화해위 보고서를 읽다 아득한 느낌이 나서 그냥 책을 덮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그 일을 기억에서 지우려 노력했습니다.

이번호에선 또 하나의 학살 사건을 다룹니다. 눈 밝은 독자님들은 아시겠지만, 은 제1183호에서 미얀마 민주화운동 지도자 민 코 나잉의 인터뷰를 실었습니다. 그는 미얀마군에 의한 로힝야 학살 사태를 외면하는 아웅산 수치에 대한 국제적 비난 여론에 대한 견해를 묻자 “그래도 수치의 리더십이 불가피하다”고 외쳤습니다. 이번호에선 공교롭게도 그에 대한 반박으로 들리는 미얀마~방글라데시 국경지대 르포를 싣습니다. 김기남 ‘아시아 인권평화 디딤돌’ 상근활동가와 조진섭 사진작가가 전하는 ‘툴라톨리 마을 학살 사건’의 참상은 너무 끔찍해 뭐라 표현할 길이 없습니다.

지난 8월부터 석 달 동안 미얀마에서 수많은 ‘김용식’들이 등장했을 겁니다. 김용식도, 수많은 로힝야를 학살했을 미얀마인들도 그들의 학살을 정당화하려는 ‘내적 논리’가 있을 겁니다. 다시 한번 눈앞이 아득해집니다.

그러나 우린 생각합니다. 어떤 일이 있어도 사람이 사람을 죽여선 안 됩니다. 야만적인 폭력에 온몸을 던져 저항해야 합니다. 당신들은 인간이라 할 수도 없는 미개하고 잔인한 이들이라고, 기회 있을 때마다 게거품을 물며 비난하고, 분노하며, 우리가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해야 합니다.

길윤형 편집장 charisma@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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