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NS 등에서 화제가 된 ‘대구 여고생 연설’을 보았다. 논리의 정연함과 주장의 명쾌함에 감탄했다. 청소년운동에 몸담았던, 고향의 옛 친구에게 연락해 수소문해보았다. ‘대구 여고생’은 인터뷰 요청에 일절 응하지 않고 있다. 다행히 별다른 불이익을 받진 않았다. 연설은 논술 동아리 친구와 함께 준비했다. 원래부터 공부 잘하고 똑똑한 학생인데, 청소년운동에 연관된 적은 전혀 없다.
‘대구 여고생’은 11월5일에 연설했다. 그의 연설 영상 위로 오래전 일이 겹쳤다. 1990년 11월4일은 일요일이었다. 전날인 11월3일은 ‘학생의 날’이었고 나는 고등학생이었다. 학생의 날은, 1929년 광주학생운동을 기점으로 전국으로 확산된, 3·1 만세운동 이후 최대 규모의 시민참여 독립운동을 기리는 날이다. 주역은 10대였다.
우리 스스로 기념하고 싶었다. 대학교 소강당을 빌려 작은 집회를 준비했다. 아침부터 실비가 내렸다. 대학 교문 앞에 불청객들이 모여 들었다. ‘게슈타포’ ‘미친 개’ 등으로 불리는, 각 고등학교 학생주임 교사들이었다. 그들은 제 학교에 다니는 학생들을 솎아냈다. “어이, ○○○, 뭐하러 왔어? 집에 가. 가라고!” 고등학생들은 비애 섞인 얼굴로 발길을 돌렸다.
용케 행사장에 모인 몇몇 아이들이 궁리를 모았다. 대학생 흉내를 내기로 했다. 마스크로 코 아래를 가리고 쇠파이프를 들었다. 가슴이 쿵덕쿵덕 뛰었다. 고함을 지르며 달려가니 ‘게슈타포’와 ‘미친 개’들이 도망갔다. 내가 다니던 학교의 학생주임도 있었다. 뛰는 그와 쫓던 나의 눈이 마주쳤다. ‘이게 무슨 짓인가.’ 패륜의 자괴감에 빠진 나는 그날 밤 소주를 많이 마셨다.
26년 동안 많은 변화가 일어났다. 그날 학생주임들을 몰아내고 행사장에 모인 고등학생은 불과 수십 명이었다. 이제 각 집회마다 수백~수천 명의 청소년들이 몰려다닌다. 그 시절 학생들은 한사코 신분을 숨겼다. 이제 청소년들은 교복을 입고 이름과 학교까지 밝히며 발언한다. 그 시절 학생들의 무기는 기껏해야 대학생을 흉내낸 쇠파이프의 과격함뿐이었다. 이제 청소년들은 기발하고 경쾌한 감각으로 새로운 정치를 창조해낸다.
변화를 꼽아보는 것은 즐겁지만, 그 이면에서 불변의 실체를 알아차리는 일은 슬프다. 그 시절 학생들은 박정희 이후 계속된 군사정권의 퇴진을 외쳤다. 오늘의 청소년들도 박정희 이후 고착화된 정경유착과 권력부패와 밀실정치의 퇴출을 외친다. 아직도 박정희의 망령과 용쓰며 씨름하고 있으니 역사적 답보와 퇴행은 가히 절망적이다.
그러나 절망은 힘이다. 절망할 이유가 없는 이에게 희망은 무의미다. ‘대구 여고생’은 희망을 말했다. “1960년 2월28일, 대구 학생들이 불의와 부정을 규탄하여 민주주의를 지켰듯이, 또다시 정의의 기적을 일구어야 할 때입니다.” 2·28 학생 시위는 4·19로 이어졌고, 이승만 대통령을 퇴진시켰다. 다른 곳도 아닌 대구에서, 다른 사람도 아닌 고등학생들이 다시 일어났다. “우리는 꼭두각시 공주의 어리광을 받아주는 개돼지가 아니다”라고 말한 ‘대구 여고생’은 연설을 이렇게 끝맺었다.
“이 길의 끝은 어딘지, 거기 무엇이 있을지 또 얼마나 걸릴지 모르겠지만 꼭 그 끝을 봅시다. 자유롭고 정의로운 대한민국의 무궁한 영광을 위하여, 민주주의여, 만세!” 그 외침처럼 이제 끝을 볼 때가 왔다. 그만. 이제 그만. 제발 그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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