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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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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년

등록 2016-10-04 17:15 수정 2020-05-03 04:28

대학 신입생이던 1991년 4월26일, 명지대생 강경대씨가 시위 도중 경찰에 맞아 사망했다. 그날 밤, 시신이 있는 신촌 세브란스병원으로 달려갔다. 그 뒤로도 몇 달 동안 고등학생·대학생·노동자·시민은 경찰에 맞아 죽거나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그때마다 죽은 이의 몸뚱이를 경찰로부터 지키려는 이들이 전국 곳곳의 병원에서 한뎃잠을 잤다. 기막힌 시절이었다. 나날을 집회와 시위로 채웠지만, 세상은 조금도 바뀌지 않았다. 나는 크게 실망하여 하숙집에 틀어박혔다.

그러던 어느 날, 학교 담벼락에 붙은 대자보를 보았다. 성균관대생 김귀정씨가 시위 도중 경찰에 맞아 죽었다는 내용이었다. 나 대신 그가 죽은 것처럼 생각됐다. 5월25일이었다. 서울 명동 백병원에 갔다. 영안실에 이르는 길목마다 바리케이드를 쌓아올리고 번을 섰다. 하필 내가 보초를 섰던 새벽, 경찰이 왔다. 난생처음 물대포를 보았다.

물대포는 최루액을 부채살 모양으로 공중에 뿌렸다. 온갖 종류의 최루탄을 겪었으나 그런 것은 처음이었다. 따갑고 아프고 차갑고 잔인한 물이 하늘에서 떨어졌다. 경찰은 최루액으로 가림막을 치고 그 뒤에서 최루탄을 쏘았다. 오장을 게워내는 구역질이 나서 숨을 쉴 수 없고, 겨우 정신을 차려도 폭포수 같은 최루액 때문에 시야가 확보되지 않았다. 속수무책이었다.

머리에 최루탄 파편이나 돌을 맞아 피흘리는 이들이 속출했다. 병원 응급실에서 처치받은 붕대를 머리에 두르고 다시 바리케이드로 달려가는 이를 나는 보았다. 최루액이 흘러내리는 바닥에 주저앉아 우는 이도 보았다. 눈물·콧물·최루액이 범벅되어 온통 액체의 형상이 되어버린 어느 여학생이 부들부들 떨며 경찰을 저주하는 것도 보았다. 이렇게 죽는구나 싶었다. 나는 도망쳤다. 병원 화장실에 들어가 문을 걸어 잠갔다. 분했으나 무서웠다. 도망쳤으나 수치스러웠다.

25년 전 봄날에 보았던 것을 이 가을에 다시 본다. 지금 서울 연건동 서울대병원 장례식장에는 궁벽한 처지에 몰려 집회·시위에 나섰던 사람이 주검이 되어 누워 있다. 집회·시위의 자유를 믿고 거리에 나섰으나 완강한 차벽으로 수천 명을 갈가리 찢고 막아 공연히 군중을 흥분시킨 경찰에 의해 죽임당한 사람이다. 왜 집회를 막느냐고 항의하며 차벽을 두드리고 밀었다고 그 백배, 천배의 체계적·조직적 폭력을 당하여 죽은 사람이다. 그 죽음에 예우를 갖추자는데도 기어이 주검을 쪼개고 자르고 적출하자는 위협을 만나 죽어서도 모욕당하는 사람이다. 그리고 그를 지키겠다는 사람들이 병원에 모여 신문지를 바닥에 깔고 잠 오지 않는 밤을 버티고 있다.

25년 전 그날, 나는 하숙집에 돌아와 앓아누웠다. 도망치지 않는 사람이 되고 싶었다. 그 부끄러움이 남아 이렇게 살고 있다. 그러나 아직도 물대포를 없애지 못했고, 집회·시위의 진정한 자유를 확보하지 못했다. 국가폭력을 제한하는 법률을 만들지 못했고, 시민의 죽음에 예의를 갖추는 사회윤리도 마련하지 못했다.

우리의 무기가 총이나 칼이나 아니면 그 흔한 몽둥이나 물대포 또는 법이라든가 금배지라든가 돈이 아니라 그저 글자 나부랭이에 불과하다는 것이 새삼스럽다. 그래도 다른 재주가 없으니 이것이나마 영전에 바친다. 백남기 농민의 삶과 죽음을 표지이야기로 기린다. 그를 지키는 사람들의 곁에 서서 함께 버티겠다. 이제는 도망가지 않겠다.

안수찬 편집장 ah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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