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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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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아

등록 2016-09-27 17:51 수정 2020-05-03 04:28

천재적 정치학자 전인권은 2005년 48살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슬픔에 잠긴 지인들이 그의 박사학위 논문을 책으로 엮었다. 박정희의 정치를 심리인류학적으로 분석한 역작, (이학사)이다. 저자가 보기에 박정희는 강압적 아버지와 절연한 이후 ‘심리적 고아’ 상태가 됐다. 이윽고 고아 상태를 벗어나려고 ‘정신적 제왕’의 행위를 벌였다. 박정희는 외로운 아이와 강력한 황제의 정체성을 오갔다.

그의 정치적 이상은 단순하고 유아적이었으나, 그 구현에 있어 주도면밀했다. 그는 주종관계에 유능해 순응자에게 공손했으나, 평등한 대인관계에선 무능해 도전자에게 무자비했다. 공식적 관계에선 사사로움을 배척했으나, 비공식적 관계로 여겨지면 비밀주의로 일관했다. 늘 미래를 말했지만, 언제나 과거 사례를 모범으로 치켜세웠다. 역사의 연속성을 강조하면서도 자신의 과거는 곧잘 부정하거나 그런 과거가 없었던 것처럼 행동했다. 그는 인생에 대한 극단적 허무에 빠져 있었지만, 곧잘 영웅적 면모를 과시하려 했다.

아버지의 특성이 자식에게 그대로 적용된다고 생각하진 않는다. 다만 ‘심리적 고아’라는 정체성이 대물림된 것이 아닌가, 가끔 궁금해진다. 박근혜 대통령의 생애에서 부모의 죽음은 결정적 사건이다. 어머니는 공산주의자에게, 아버지는 배신을 결심한 정치인에게 죽임을 당했다. 두 죽음을 지켜본 그가 북한, 그리고 내부 혼란에 대해 느끼는 공포는 어마어마할 것이다.

‘심리적 고아’는 현재를 항상 극단적 위기 상태로 인식하는 경향이 있는데, 박 대통령의 북한 급변론도 그것과 유사해 보인다. 죽음·혼란·배신에 대한 공포로 인해 어쩌면 박 대통령은 질서와 안정을 흠모할 것이다. 그래서 법률가를 한사코 곁에 두는 한편 의회를 멀리하고, 정갈한 시공간에서 극진한 예우를 받는 해외 순방을 즐기는 것인지도 모른다.

정치학자 전인권이 살아 있었다면, 박 대통령을 분석하는 좋은 글을 썼겠지만, 나에겐 그럴 만한 능력이 없다. 오직 한 가지, 어린 시절 애착관계를 형성하지 못하고 오랫동안 버림과 배신의 공포에 시달린 이에겐 ‘정서적 지원’이 매우 중요하다는 것을 알고 있다. 어떤 사람은 성스럽고 영적인 것에서 도움받는다. 어떤 이는 반려견을 곁에 두어 이를 해소한다. 또 다른 이는 연인을 구하기도 하고, 때로는 죽이 맞는 친구를 곁에 둘 수도 있겠다.

사람의 한평생을 떠받치는 것은 명예와 이념이 아니라 욕망과 공포다. ‘공적 자아’도 마찬가지다. 공포와 욕망 사이에서 흔들리는 대통령의 마음을 평생의 친구가 어루만져줬다면, 참 아름다운 일이다. 그런데 그 정서적 지원자가 권력의 비호 아래 어마어마한 이권을 챙겼다는 언론 보도가 잇따르고 있다. 훗날 미담이 될 수도 있었던 관계가 희대의 권력형 비리로 번지게 된 것은 누구 탓일까.

위로받아 마땅한 이들을 제대로 위로하지 않으면서 자신의 마음 빈자리만 위로받으려는 대통령에게 진정한 위로의 길 하나를 보여주고 싶다. 만 2년6개월째 계속되는 세월호 추적보도다. 세월호 특조위가 9월30일 문을 닫는다. 관련 단독 보도를 연이어 내놓는다. 지금 한국의 장삼이사들이야말로 부모 잃은 고아의 처지에 놓여 있으니, 이라도 나서서 그 트라우마를 어루만지고 싶다. 대통령이 잘 모르는 것 같아 귀띔하자면, 누군가 진정으로 위로하면 그 자신도 위로받는다.

안수찬 편집장 ah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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