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이 꾸무룩하여 막걸리 마시기에 좋았다. 기자는 삼합을 미리 주문했다. 주간지 마감이 시작되는 목요일마다 그랬던 것처럼 이날도 기자는 점심을 걸러 배가 고팠다. 매캐한 홍어를 꽁꽁 씹으며 텁텁한 막걸리를 훌훌 마시는 상상으로 오후를 버텼다.
도착해 마주 앉는 소설가에게 기자는 공치사를 했다. “얼굴 좋아지셨네요.” 소설가는 ‘어디서 괜한 수작을 거느냐’는 표정을 지었다. 수작은 계속됐다. “선생님 글 읽는 재미로 매주 (실제로는 격주였다) 마감했는데, 그게 저희 지면에서 제일 재밌는 글이었는데, 이제 어쩌지요.” 소설가는 이날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겸양했다. 그동안 지면을 내주어 고맙다고 말했다.
초록 병에서 노란 술을 부어 벌건 입속에 털어넣는 동안, 대화는 육지와 바다와 섬으로 싸돌아다녔다. 이야기의 성찬에 파묻힌 기자는 소설가의 하루를 상상해보았다. 일어나 컴퓨터 켜고, 서너 시간 글을 두들기고, 오후엔 낚시하고, 고등어를 회 쳐서 소주 한잔 하고, 낮잠 좀 자두고, 마을 친구들과 또 한잔 하고, 별 볼일 없는 언쟁도 좀 벌이고, 잠을 청하러 집을 향할 것이었다. 귀신 나온다고 전 주인이 도망쳐버려 싸게 얻은 슬라브 지붕의 두 칸짜리 집. 작고 조용한 집.
소설가가 쓴 어느 단편의 문장을 차용하자면, 섬의 바람에서 휘파람 소리가 나는지, 나비가 팔랑거리는 남풍은 언제 부는지, 잔파도가 칠 때마다 까르르거리는 해변은 얼마나 넓은지, 물총새 날갯짓 같은 울음을 내는 돌고래는 자주 마주치는지, 기자는 궁금했다. 왜 고향 섬으로 돌아갔는지, 왜 혼자 지내는지, 왜 소설을 쓰는지도 궁금했으나 묻지 못했다. 막걸리 몇 잔에 나눌 이야기는 아닌 것이다.
그을린 얼굴에 은발을 얹고 깊게 파인 쌍꺼풀에 맑은 눈동자를 달아놓은 소설가와 대작하면서, 기자는 아르놀트 하우저의 글을 떠올렸다. ‘기자는 본질적으로 정치적인 동시에 문학적’이라고 라는 책에 하우저는 적었다. 나이가 든다는 것은 정치에서 문학으로 진화하는 과정이 아닐까 기자는 생각해 보았다. 정치적 존재가 되고 싶었기에 기자의 길을 택했으나, 그 길이 문학을 향하는 것임을 뒤늦게 알아차리고 나면, 문득 깨달음이 온다. ‘아, 그런데 나에겐 문학의 재능조차 없구나.’ 기자는 소설가를 쳐다보다 술 마시다 또 쳐다보았다.
소설가는 1년2개월여 동안 ‘산다이’(필부들의 잔치판)에 대해 썼다. “그런데 오늘 넘긴 마지막 글은 재미없어요. 마지막이니까, 드디어 연애 이야기를 쓰실 줄 알았거든요.” 기자가 도발하자, 소설가는 이날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진지한 표정을 지었다. 진짜 산다이는 광장에서 벌어진다는 이야기를 꼭 적고 싶었다고 심각하게 말했다.
막걸리 10여 통을 싹싹 비우고 자리를 털었다. 소설가는 마포 뒷골목의 어둠 속으로 설렁설렁 걸어 들어갔다. 기자는 좀 풀이 죽었다. 이제 그의 산다이를 더 읽을 수 없구나. 그러다 다른 생각이 났다. ‘바글시민 와글입법’으로 이번주 표지 기사를 채울 터였다. 뭐 그것도 산다이지. 이름 없는 이들이 광장에 모여 난장을 벌이는 산다이.
남풍을 타고 해변에 몰려든, 물총새 날갯짓 같은 울음을 내는 돌고래처럼 좀 재밌게 놀아보자, 고 기자는 생각했다. 소설가는 섬에서 좋은 글 많이 쓰시라 하고, 우리는 정치와 문학을 섞어 새로 산다이 해보자, 고 심통을 내보았다. 기분이 조금 나아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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