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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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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52

등록 2016-06-14 15:32 수정 2020-05-03 04:28

아이는 어른을 한없이 약하게 만든다. 아이는 어른이 의도한 존재가 아니다. 아이는 기대보다 언제나 가냘프다. 아이가 아프면 어른의 마음은 수만 갈래로 조각난다. 그것이 중병이라면 부서진 마음 갈래마다 무기력이 깃든다. 어쩔 수 없고, 방도가 없고, 그저 운명인 일들이 자꾸 생겨난다. 무기력은 전염되므로 마침내 모든 가족에게 무력감의 깊은 소가 생긴다. 마지막 순간, 한국의 부모들은 마지막 용기를 낸다. ‘구걸의 용기’다.

부부가 함께 벌어도 연간 수천만원의 병원비를 감당하기 힘들지만, 둘 중 하나는 바싹 붙어 간호해야 하므로 홑벌이로 버텨야 한다. 빚이 늘고 이자가 불고 그 이자의 이자조차 갚을 힘이 사라져간다. 한부모가정 또는 조손가정이라면 어른은 아이와 함께 벼랑으로 끌려간다.

그때 어른은 용기를 낸다. 죽기로 결심하기 직전의 용기다. 그것이 누추한 구걸의 모양새임을 모르지 않지만, 입술을 깨물고, 생전 처음, 손을 내민다. 누구건 좀 도와달라고 호소한다. 낯선 기자를 만나 아픈 아이의 사진을 찍게 하고, 스스로 방송에 등장해 눈물 흘리며, 켜켜이 쌓인 병원비 고지서를 보여준다. 그것은 욕창을 드러내는 일이다. 고통으로 짓물러 서럽고, 가리고 싶은 고름덩이를 남에게 보여줘 서러우며, 한 번으로 끝날 일이 아니라 더 서럽다.

물론 우리가 인간이라면 그들에게 동전 건네는 동정심은 갖춰야 한다. 그러나 우리는 인간이므로 개인의 동정에만 기대어서 안 된다는 것을 알아차려야 한다. 당연히 우리는 인간이기에 모두를 제대로 돕는 데 필요한 돈이 얼마이고, 그 돈을 마련하려면 무슨 일을 해야 하는지 셈을 해야 한다.

5152억원이다. 0~15살 어린이가 어떤 병으로건 입원하면 그 비용 전액을 국가가 보장하는 데 필요한 돈이다. 이렇게 되면 중병인지 아닌지, 몇 번이나 수술해야 하는지, 얼마나 입원해 있어야 하는지, 복잡하고 애달프게 따지지 않고 모든 어린이가 무료로 치료받을 수 있다. 완치는 과학의 영역이겠지만 적어도 돌봄은 인간의 영토에 머물러 있게 될 것이다. 그제야 어른은 운명에 맞서 최선을 다해 아이를 사랑할 수 있게 될 것이다.

그 돈을 마련하려고 특별한 세금을 내야 하는 것도 아니다. 현재 국민건강보험 재정 흑자가 17조원이다. 그 3%만 헐면 된다. 모금방송을 보며 눈물짓던 어른들은 정작 이런 일에 쓰라고 곳간에 쌓아둔 돈이 그렇게 많다는 것을 알아차리지 못했다. 알고 지은 죄보다 모르고 짓는 죄가 더 큰 법이다. 어른들이 저지른 무지의 죗값을 아픈 아이와 그 부모가 공연히 짊어져온 것이다.

그들을 만나고 돌아올 때마다 풀 죽었던 박수진 기자가 모처럼 웃었다. 그의 말처럼 “모금 없는 세상을 위해 모금하려는” 연재 기획 ‘아이가 아프면 모두가 아프다’의 작은 결실이 맺어졌다. 정의당이 관련 개정법안을 발의했다. 반드시 국회에서 통과시키겠단다. 다음 결실은 이번보다 더 크고 좋고 아름다우며 소중할 것이다.

5152억원. 어른을 한없이 약하게 만드는 아이들을 위해 한국의 어른들이 마련할 수 있는 가장 값진 돈이다.

추신: 지난호(제1115호) 이 칼럼에서 ‘E=mc²’을 ‘E=MC²’으로 잘못 적었습니다. 인터넷 등에선 바로잡았으나, 지면엔 잘못 적은 그대로 나갔습니다. 무식을 드러내어 부끄럽고 죄송합니다.안수찬 편집장 ah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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