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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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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핍

등록 2016-04-19 15:31 수정 2020-05-03 04:28

결핍은 이중적이다. 포기를 부르거나 개척을 낳는다. 팔자가 이렇지 싶어 무력해지면 앉아서 굶어죽는 것이고, 주어진 운명이 이럴 리 없다 싶으면 일어나 살길을 궁리한다.

의 결핍에는 놀라운 바가 있다. 한때 이 매체에는 적어도 4명의 정치 담당 기자가 있었다. 좋던 시절은 고만 끝나버렸다. 지난 반년 동안 에서 정치 담당 기자는 딱 한 명, 송호진 기자뿐이었다. 이 지경이 되어버린 신문사 내부의 곡절을 적자니 눈물이 나서 못하겠다.

여하튼 이래 갖고는 정상적(이라기보다 관습적)인 정치 기사를 쓰기는 불가능한 것이다. 그 결핍의 상황에서 우리는 제20대 총선을 맞았다. 포기하거나 개척해야 했다. 송 기자의 번듯했던 얼굴은 시커메졌다. 후배 기자들은 사람 좋은 팀장을 망치는 편집장의 부덕을 타박했다.

그 와중에도 나는 우리의 결핍이 포기가 아니라 개척으로 진화할 것임을 진작부터 알고 있었다(기 보다는 그렇게 되기를 소망했다).

현대 언론의 초석을 놓은, 대중을 불신하고 기자를 조소하면서도, 대중을 일깨우는 좋은 기자가 되려 몸부림쳤던 월터 리프먼이 에서 일찍이 냉소했던 바와 같이, 언론은 (예외적 경우를 제외하면) ‘원재료’를 직접 보도하는 게 아니라 원재료를 양식화(樣式化)한 ‘자료’만 보도한다.

그 대표 영역이 정치 보도다. 이번 총선에 대한 한국 언론의 보도를 두고 ‘새누리당 참패를 제대로 예측하지 못했다’는 지적이 있는데, 절반만 동의한다. 기자는 점쟁이가 아니고, 정치 기사의 고갱이는 예측 기사가 아니다. 선거 예측을 잘하려면 여론조사를 과학화하면 된다. 그러나 그것은 정당이나 조사기관이 신경 쓸 일이다.

총선 보도에서 드러난 한국 언론의 가장 큰 문제는 정치의 원재료가 아니라 ‘양식화된 자료’만 베껴쓴 데 있다. 당직자 회의, 보도자료, 대변인 브리핑 등에 온전히 기댔다. 기자는 받아쓰기를 주로 했고, 오직 고참 기자들이 각자의 방식으로 논평을 보탰다. 여론조사 인용 보도는 양식화된 자료 받아쓰기의 대표 격이자 전형이었다. 그런 자료에 기대면, 원재료를 포장하고 가공하는 파워엘리트에 의해 기사 방향과 내용이 결정된다. 정치 보도의 시선은 오직 그들에게 맞춰진다.

그렇다면 정치의 ‘원재료’는 무엇일까. 세상 모든 일이다. 정치는 각자의 욕망을 구현하기 위한 자원 동원의 투쟁이므로 삼라만상이 정치 뉴스의 재료다.

지난 두 달여 동안, 우리는 여론조사 보도를 극구 회피했다. 그렇다고 송 기자 혼자 감당할 수는 없었다. 분석기관이나 젊은 미디어 스타트업과 협업했다. 여야 승패보다는 지역주의 돌파의 가능성을 점검하고, 노인과 청년의 정치의식을 현장에서 직접 취재했다. 결핍에도 불구하고 정치 보도의 새로운 장르를 개척하려 여러 일을 도모했다.

최근 정치 담당 기자의 인력이 두 배로 늘었다. 지난 2년여간 새누리당 등을 담당했던 서보미 기자가 다시 왔다. 그는 섬에서 태어나 육지에서 공부했다. 해군사관학교를 때려치고 종합대학을 다녔다. 월급 많은 경제 일간지를 떠나 결핍투성이의 매체로 옮겨왔다. 정치의 원재료를 발굴하는 데 필요한 자질이 있다. 혼융의 상상력과 결단의 용기, 좋은 기사를 쓰고야 말겠다는 자존감 등이다. 모든 것을 갖춘 서보미 기자와 함께 제20대 국회에 대한 새로운 정치 기사를 속속 선보이겠다.

안수찬 편집장 ah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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