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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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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글픈 4월

등록 2016-03-29 15:42 수정 2020-05-03 04:28
<font color="#991900">*2012년 2월12일 에 실린 졸문 ‘한나라당의 최후’ 일부 내용이 포함돼 있습니다.</font>

영국의 에드먼드 버크는 보수주의의 창시자다. 그가 진저리 쳤던 것은 프랑스혁명이 불러들인 대혼란이었다. ‘정서적으로’ 나는 버크에 공감한다. 전쟁을 반대하는 것과 똑같은 심정에서 혁명이 두렵다. 기성 체제를 절멸시키는 혁명은 한 세대의 생물학적·정치적 에너지를 소진시킨다. 폐허 위에 들어설 ‘새 세상’이 아무리 훌륭한들, 그 땅 밑에 사람들이 죽어 묻히는 일이 나는 싫다.

보수주의는 혁명에 대한 공포에 뿌리를 둔다. 다만 혁명에 대한 두려움 그 자체는 ‘수구’에 불과하다. 서구 보수정당은 혁명에 대한 공포를 정치 전략으로 승화시켰다. 그 한복판에 두 인물이 있다. 영국 보수당의 벤저민 디즈레일리와 독일의 재상 오토 폰 비스마르크다.

19세기 후반, 디즈레일리는 보수당 30년 집권의 길을 열었다. 이를 가능케 한 것은 노동자들의 지지였다. 그는 노동자에게 선거권을 줬다. 노동조건·공장환경·공중보건·공공교육 등에 걸친 사회개혁입법도 완성했다. 인민의 상태가 정치의 중심 과제라고 주장했다. 그가 이끈 보수당의 개혁입법은 ‘요람에서 무덤까지’로 불리는 20세기 영국의 복지 체제로 이어졌다.

비슷한 시기, 비스마르크는 사회주의 혁명세력과 맞서고 있었다. 그는 선한 보수주의자는 아니었다. 채찍으로 그들을 탄압했다. 다만 다채로운 당근도 준비했다. 건강보험, 산재보상, 노령연금법 등을 제정했다. 비스마르크의 제안을 받아 작성된, 황제 빌헬름 1세의 의회 교서가 있다.

“도움을 필요로 하는 자를 더 잘 돌봐주는 것은 인간에 대한 의무이자 국가조직에 깃든 그리스도교의 의무다. (이는) 국가를 유지하는 정책적 과제이기도 하다.” 이런 것이야말로 보수 정치세력이 문명에 기여하는 품격의 정체다.

20여 일 앞으로 다가온 이번 총선은 ‘진성 보수정당’의 자리를 두고 벌이는 각축전이 됐다. 새누리당, 더불어민주당, 국민의당 등 원내 교섭단체를 구성한 3개 정당 모두 보수정당을 자처하고 있다. 보수주의가 무엇인지 따지고 경쟁하는 정책·의제·논쟁은 없고, 보수 지지자를 향한 구애만 넘쳐난다.

그 한복판에 김종인 더민주 비상대책위원회 대표가 있다. 이것은 물론 ‘역사적 전환’이다. 더민주가 전통적 보수층을 뺏어오는 ‘보수 전환’에 성공한다면, 새누리당은 대북 강경책만 내세우는 극우정당으로 전락할 것이다. 변신한 더민주의 왼쪽에 진보정당의 새로운 공간이 생겨날 수도 있다.

그런 지형을 도모하는 김 대표의 머릿속에 디즈레일리과 비스마르크가 있는지 없는지는 모르겠다. 다만 그들에게 있었으나 김 대표에게 없는 것이 있다. ‘강력한 좌파’가 없다. 한국에선 노동조합도 진보정당도 허약하다. ‘공포’의 대상이 없는 보수주의는 기득권 유지의 깔때기로 빨려들어갈 수밖에 없다. 지금 김 대표를 움직이는 것은 혁명에 대한 공포가 아니라 선거 전략의 산술이다.

합리적 보수정당의 탄생은 좋은 일이다. 그 점에서 김 대표의 실험은 흥미롭다. 진보세력이 취약한데 보수 정당의 합리화가 어찌 가능한지는 잘 모르겠다. 그 점에서 김 대표의 실험을 비관한다. 절실한 것은 도발적 진보 의제다. 그 점에서 나는 이번 총선이 서글프다. 보수 경쟁만 판치는 총선은 살다살다 처음이다. 마지막이 되길 바란다.

안수찬 편집장 ah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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