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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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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장

등록 2015-09-22 15:59 수정 2020-05-03 04:28

우리 매체를 찬찬히 읽어봐주시는 어느 교수님이 얼마 전 전화하셨습니다. 이것저것 격려도 하고 지적도 하셨습니다. 질문도 하셨습니다. “근데, 편집장 칼럼에서 기자 이야기를 너무 많이 하는 게 아닐까요.” 맞는 말씀입니다. 너무 많이 합니다. 그 통화에서 미처 설명하지 못한 진짜 이유를 고백합니다.

올가을이면 기자 노릇 18년입니다. 원래 공상하길 좋아하고 추상적으로 말하면서 뒹굴뒹굴 누워 게으름 피우는 인간이었는데, 세상 바닥을 기어다니다 기자 체질로 변했습니다. 추상과 개념과 이론이 싫어졌습니다.

지금 적고 있는 이런 나부랭이를 혹여 글이라 부를 수 있다면, 제 글의 원천은 현장입니다. 구체적 시공간의 사람, 사건, 표정이 저로 하여금 글을 쓰게 합니다. 보고 듣고 만지고 깨물지 않으면 글을 쓸 수가 없습니다. 구체적으로 만져지는 삶의 옹이를 담아내는 르포르타주만이 진정한 글이라고 굳게 믿습니다.

그런데 지난봄부터 편집장이란 걸 맡았습니다. 이제 보고 듣는 것이라곤 함께 일하는 기자들밖에 없습니다. 저에게 현장은 이곳, 책과 서류가 아무렇게나 쌓여 있는 뉴스룸뿐입니다. 개념과 이론을 늘어놓을 재주가 없는 저로선 기자들에 대해 적을밖에 다른 도리가 없습니다. 직접 취재하지 않은 정치와 경제와 사회에 대해 함부로 말할 용기가 없습니다.

이니 니 하는, 기자를 주인공 삼은 외국 드라마가 있습니다. 드라마 속 기자들은 한결같이 야심가입니다. 진실을 보도하는 일에 모든 것을 바칩니다. 그들은 단단히 미쳐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몰입하는 사람은 그렇지 않은 사람의 눈에 광인으로 보이는 법인데, 드라마에는 온통 ‘좋은 뉴스’에 몰입한 괴짜들만 등장합니다.

실제 외국 기자들이 그러한지는 잘 모르겠지만, 한국의 뉴스룸에는 그런 야심가가 희귀합니다. 관습이 관성적으로 반복될 뿐입니다. 정해진 형태와 절차에 따라 기사를 마감합니다. 급기야 그것은 일상이 됩니다. 일상은 견뎌내고 치러내는 것이지 준비하고 도모하는 일은 아닙니다. 기자의 삶은 대체로 지루합니다. 그저 좀 고되고 힘들게 지루하달까요. 그래서 제 글에 담기는 ‘현장’은 아직까진 밋밋합니다.

그런데 최근 뉴스룸에서 조금 다른 일이 진행되고 있습니다. 관습을 의심하고 관성을 떨쳐내려 하고 있습니다. 기자의 취향, 독자의 취향, 독자가 아닌 자의 취향에 대해 토론하고 있습니다. 일상을 일상적이지 않게 보내는 일을 도모하려니 스트레스도 높아졌습니다. 술자리에선 투닥거리며 언성을 높입니다. 기존 일상을 뒤흔들려다보니 생기는 일입니다.

이렇게 살 비비며 푸닥거리하는 일을 좋아서 고른 것은 아닙니다. 사람은 만나고 헤어지는 일을 고르지 않습니다. 모든 선택지를 늘어놓고 하필 이런 삶을 살겠다고 선택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런 일은 그저 생겨납니다. 하필이면 서로를 만나고 또 헤어지는, 유독 이렇게 살아가버리는 것은 온통 우연입니다.

다만 우연에 대처하는 태도가 삶의 경로를 결정합니다. 2015년 가을을 우연히도 함께 보내게 되어버린 우리는 기왕 이렇게 된 거, 좀 끝장을 보려고 합니다. 이런 언론 저런 언론이 많다지만, 여전히 드물고 귀한, 믿을 만하고 폼나는 언론을 만들려고 온갖 몸부림을 치는 중입니다.

그러니까 이 글은 독자 여러분에게 전하는 기자들의 ‘리얼다큐’입니다. 지난 6개월 동안 기자들의 암중모색을 담은 ‘시즌1’을 전해드렸다면, 이제부터 시작되는 ‘시즌2’는 실험과 실패, 어쩌면 희귀한 성취에 대한 것이 될 겁니다. 관습의 일상에서 탈주해 야심으로 몰입하려는 어떤 기자들에 대한 르포르타주를 앞으로도 적겠습니다. 마음 빈자리에 매일 바람이 붑니다. 그 옹이를 계속 전하겠습니다.

안수찬 편집장 ah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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