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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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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리랑

등록 2015-08-11 16:51 수정 2020-05-03 04:28

얄팍한 독서 이력이 편리할 때가 있다. ‘인생의 책이 무엇이냐’는 질문에 아주 빨리 답할 수 있다. 너무 분명해서 고민조차 필요하지 않다. (동녘)이다.
여드름과 코밑 수염과 몽정이 단번에 몰아닥쳐 정신 차릴 수 없었던 중학교 3학년 무렵 처음 읽었다. 충동과 파괴의 호르몬에 지배당하던 고등학교 3학년 무렵 다시 꺼내 읽었고, 시위 도중 사람들이 죽어가던 대학 초년 시절 또 읽었으며, 신문사 합격 통보를 받고는 씹어삼키듯 거듭 읽었다. 10대 중반 이후 그 책을 적어도 10권은 샀다. 내가 꿈꾸는 삶이 여기 있어, 라고 말해주고 싶은 사람을 만날 때마다 그 책을 건넸다.
많던 책들은 어디론가 새 주인을 찾아 떠났고, 서재엔 1990년대 초반에 구입한 판본이 남아 있다. 군데군데 밑줄 쳐둔 문장들이 있다. 혁명가 김산(본명 장지락)의 여러 육성 가운데서도 허약했던 영혼에 근육을 붙여준 하나의 빛나는 말이 있다.

“내 전 생애는 실패의 연속이었다. 나는 단 하나에 대해서만, 나 자신에 대하여 승리했을 뿐이다. 그렇지만 계속 전진할 수 있다는 자신을 얻는 데는 이 하나의 작은 승리만으로도 충분하다. 내가 경험했던 비극과 실패는 나를 파멸시킨 것이 아니라 강하게 만들어주었다.”

언젠가 돌이켜 저렇게 말할 수 있기를 얼마나 바랐는지 모른다. 모든 것에 패배했다는 것을 인정할 수 있도록 모든 것과 맞붙어보기를, 하여 스스로에겐 승리할 수 있기를 꿈꾸었다. 그 의미조차 모르면서 그리 소망했다. 오늘날 이 모양의 마초꼰대로 나이 먹는 것에는 지독한 주지주의(主知主義)자였던 김산을 동경한 탓도 있을 것이다.

1920~30년대 한반도와 만주를 오가며, 낭만주의와 무정부주의를 거쳐 공산주의에서 길을 발견하고, 민족해방과 공산혁명을 이끌면서도, 죽을 듯이 사랑하고 실연했고, 누군가를 죽였고 누군가에게 간첩으로 몰려 죽임당했던 그의 삶은 결국 내가 근처에도 가닿을 수 없는 신화가 됐다. 나는 이제 불화살처럼 살 수 없게 됐다. 혁명을 신뢰하지 않고, 급진의 프로그램에 팔짱을 끼고, 좌파를 자처하면 일단 의심하게 됐다.

그러나 비루한 일상만 주렁주렁 매달려 삶을 쇠락시키는 나이가 됐어도, 가끔 김산을 생각한다. 사춘기 시절엔 한국 현대사의 이면을 발견하는 충격 속에 그를 마주했다. 혈기방장한 시절엔 혁명을 동경하며 그를 흠모했다. 이제 돌아보니, 내가 사랑했던 김산은 흔들림 없이 달려가는 혁명가가 아니라, 삼라만상에 주의를 기울이고, 오류의 복판에서도 자존감을 잃지 않아, 끝내 제 살고 싶은 바의 목적을 잃지 않는, ‘감응하여 혁신하는 인간’이었던 것임을 알겠다. 그러니 해방 70주년에 만주 벌판을 달리던 그들을 불러내는 것은 오늘을 제대로 감응하여 바득바득 살아보려는 노력이다.

혁명가에 대한 기억 없이 개혁은커녕 개선도 힘들다는 것을 매일 확인한다. 성완종 리스트의 실체는 밝혀지지 않았다. 국가정보원 대선 개입과 도·감청 의혹은 안개 속에 있다. 세월호 참사의 진상도 드러나지 않았다. 일하는 자는 가난하고, 가난한 자는 일을 구하지 못한다. 그리고 대통령은 여전히 혼자 웃는다.

한 세기에 걸친 부정의가 백악기 퇴적층처럼 쌓여 우리를 짓누르는데, 혁명가에 대한 부채의식조차 없다면 어찌 살아갈 것인가. 그러니 8·15 해방은 기념할 과거가 아니라 여전히 도모해야 할 미래다. 이번호를 해방 70주년 특집호로 꾸몄다. 국가가 이름을 불러주지 않는 독립운동가, 여전히 압제와 싸우는 그 후손, 시베리아에서 손잡은 남북의 노동자, 만행에 찢겨진 피해자들, 그를 기억하려는 사람들에 이르기까지 전진식·정은주·송호진 기자가 오랫동안 기사를 준비했다. 을 권했던 손으로 이제 을 권한다.

안수찬 편집장 ah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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