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 살 되던 해의 봄, 반바지 입고 국민학교 가는 길마다 근심에 휩싸였다. 수양버들에서 후드득 떨어져내려 길바닥에 스멀거리는 송충이만큼 징그러운 것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교실에 들어서면 칠판 왼쪽에 시간표, 오른쪽에 국민교육헌장이 적혀 있었다. 우리는 한 사람씩 불려나가 칠판 앞에 등을 대고 섰다.
첫 문장은 다들 외웠다. “우리는 민족 중흥의 역사적 사명을 띠고 이 땅에 태어났다.” 그다음부터 줄줄이 고개를 떨구었다. “나라의 융성이 나의 발전의 근본임을 깨달아… 스스로 국가 건설에 참여하고 봉사하는 국민정신을 드높인다.” 송충이 떼처럼 이어지는 단어를 놓친 아이들은 온몸을 배배 꼬며 신음했다. 대부분 두들겨 맞고 드물게 칭찬받았다. 아이들은 방과 후 교실 바닥을 걸레로 닦으며, 무슨 뜻인지 알 수 없는 문장을 외웠다. 내일 아침에도 송충이와 국민교육헌장을 통과해야 하는 것이다.
바로 그 헌장이 오늘의 ‘386세대’를 낳았다고 나는 생각한다. 국가주의에 오염된 것이긴 했지만, 그 헌장은 ‘우리’라는 관념을 그 세대에 주입했다. 개인의 삶은 공동체와 관련된 것일 때 비로소 가치를 얻는다는 ‘무의식’이 그 세대를 지배했다. 나라의 발전을 최고로 여겼던 국민학생들은 대학생의 나이가 되어 새로운 사실을 알게 됐다. 군인 대통령이야말로 나라 발전의 걸림돌이라고 ‘의식’하게 됐을 때, 그들은 반독재 투쟁에 청춘을 바치는 데 아무 거리낌이 없었다.
역사에 ‘해피엔딩’은 없다. 이율배반이 반복될 뿐이다. 민주화 이후, 교육의 틀이 완전히 바뀌었다. 국가주의를 털어내는 교과과정 개편은 김영삼 정부 시절인 1995년 완료됐다. ‘5·31 교육체제’다. 김대중 정부 시절 초·중등 과정 전체로 확대 적용됐다.
그때부터 학교에선 새로운 삶의 목표를 제시했다. 세계화 시대에 살아남을 수 있는 각자의 경쟁력을 길러야 한다고 가르쳤다. 그 결과 ‘개인’의 자리는 오롯한데 ‘우리’의 가치는 사라져버렸다. 살아남기 위한 경쟁만 남았다.
5·31 교육체제가 이제 20년이 됐다. 송충이 떼보다 더 진저리쳐지는 그 경쟁체제를 만든 것은 이른바 ‘민주세력’이다. 오늘의 20~30대가 그렇게 자라났다. 그들의 ‘무의식’에 공동체의 자리는 없다. 오늘의 청년들에게 극단적 개인주의 성향이 있다 한들, 그것이 그들의 잘못이겠는가.
이는 교육의 문제인 동시에 언론의 문제다. 젊은 세대가 뉴스 대신 오락에 몰입하는 것은 전혀 이상하지 않다. ‘우리’에 대한 관념이 형성될 기회 따윈 어차피 제공되지 않았다. 청년과 아이들은 서로 마음과 힘을 합쳐 ‘우리의 문제’를 해결하는 상상력을 좀체 발휘하지 못한다. 대신 연예와 예능과 게임을 통해 고립되어 가냘픈 실존의 상처를 달랠 뿐이다. 그런 그들에게 이웃과 공동체의 소식이 무슨 소용이겠는가.
따져 묻자면, 오늘날 청춘의 상실감 앞에 무릎 꿇고 사죄하며 진지한 대안을 내놓아야 할 것은 이른바 ‘민주세력’이다. 스스로의 가치에 침 뱉고 자신들의 자식을 오염시킨 것은 그들, 386세대다. 국민교육헌장을 대체하는 시민교육헌장을 만들 수 있었던 20년의 시간을 허공에 날려버렸다.
시민사회에 바탕을 둔 언론은 시민교육의 확대와 함께 비로소 성장할 수 있다. 국가주의를 대체할 시민주의가 있어야 시민의 언론이 자라난다. 혹시 ‘진보 교육감’이 필요하다면, 그 교육감은 민주세력의 과오를 씻어내고 진정한 ‘시민교육’을 구현한다는 전제 아래서만 그러하다. 조희연 서울시교육감에 대한 응원이 아니라 애증을 담아 이번호를 준비했다. 우리가 구하고 싶은 것은 교육감이 아니라 시민교육과 시민언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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