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것은 그 사람에게서 시작됐다. 전태일. “불쌍한 형제의 곁으로 돌아가야 한다”던 서울 청계천 평화시장의 봉제공장 노동자 전태일은 1970년 11월13일 제 몸을 불살라 외쳤다. “근로기준법을 준수하라.” “우리는 기계가 아니다.” 그날 이후, 전태일은 산 자들의 멍에이자 등대가 됐다. 노동법을 설명해줄 ‘대학생 친구’를 갈망하던 태일의 “내 죽음을 헛되이 말라”던 마지막 외침에 서울대 법대생 조영래와 장기표는 ‘낮은 곳의 사람들을 위해 생애를 바치자’고 다짐했다. 숯덩이가 되어 죽기 직전, 태일은 어머니 이소선에게 부탁했다. “어머니 담대해지세요. 내가 못다 이룬 일 어머니가 꼭 이루어주세요.” 이소선은 아들에게 다짐했다. “걱정 마라. 내 목숨이 붙어 있는 한 내가 너의 뜻을 이룰 테니.” 41년이 흘렀다. ‘노동자의 어머니’로 동분서주해온 이소선은 2011년 9월3일 소천했다. 아들 태일의 ‘사람 사는 세상’의 꿈을 이루지 못한 안타까움 때문일까. 영정 속의 이소선은 마이크를 잡고 있다. 죽음은 삶을 드러낸다. 대통령·재벌총수는 오지 않았고, 기륭전자·쌍용자동차·한진중공업 등 고단한 삶을 버텨온 노동자와 장삼이사는 오열하며 연대를 다짐했다. 그렇게 한 시대가 갔다.
이소선의 죽음은 백두대간을 종주하던 박원순을 ‘하산’하게 했다. ‘이소선 어머니가 가장 많이 상담한 변호사’인 박원순은 9월7일 노제 추도사에서 이렇게 말했다. “한국의 노동 현실은 여전히 엄중하다. 한진중공업 85호 크레인에선 김진숙 위원이 240일 넘게 고공시위를 이어가고 있다. 전태일 열사가 분신할 때와 다름없다.” 박원순은 노동운동가가 아니다. 저항보다는 대안을 중시하는 시민운동의 새 영역을 개척해온 ‘소셜 디자이너’다. 한국의 대표적인 인권변호사이자 참여연대, 아름다운재단·아름다운가게, 희망제작소를 일군 시민운동의 ‘대표선수’다. 강준만은 그를 일러 ‘대통령급 시민운동가’라고 했다. 그 박원순이 오세훈의 ‘셀프 탄핵’으로 만들어진 10·26 서울시장 보선에 뛰어들었다. 안철수와 한명숙의 양보를 얻었으니 ‘범야권 단일후보’의 자리는 멀지 않아 보인다. 그의 도전은 시대사적 의미를 지닌다. ‘서울시장 박원순’이 현실화한다면, 시민사회운동 역량이 대한민국 수도 서울의 시정을 책임지게 된다는 걸 뜻한다. 현재의 시민사회운동과 제도정치권의 재편은 불가피하다. 새 시대, 새 정치의 예고다. 한때 ‘운전사 딸린 차’를 타고 다니던 박원순을 사회운동의 길로 이끈 이는 의 저자 조영래 변호사다. 그 조영래를 만든 건 ‘아름다운 청년 전태일’이다. 그러므로, 모든 것은 그 사람에게서 시작됐다.
박원순은 이소선의 영정에 머리 숙인 날, 안철수와 만나 ‘단일화’에 합의했다. 안철수는 조건 없이 박원순에게 ‘서울시장 후보’ 자리를 양보했고, 그날 이후 ‘안철수 신드롬’은 오히려 더 거세게 정치권을 뒤흔들고 있다. 각종 여론조사에서 2012년 대선 주자로 독주하던 박근혜를 안철수는 가볍게 누르거나 박빙의 승부를 벌이고 있다. 안철수는 직업 정치인이 아니다. ‘올바른 창업가·평론가’이자 ‘윤리적 인간’의 전형으로 불린다. 안철수는 젊은이들이 가장 선호하는 멘토이자, 가장 존경하고 함께 일하고 싶어하는 최고경영자다. 안철수는 “대통령은 아무나 하나요?”라며 손사래를 치지만, 시민들은 ‘대선 후보 안철수’를 꿈꾸는 듯하다. 왜? 누군가는 말한다. “학교에서 배운 대로, 교과서대로 해도 잘 살 수 있다는 걸 보여준 사람”이라고. ‘공감의 멘토 안철수’를 향한 열광적 ‘팬덤 정치’엔 비루한 일상을 견뎌온 시민들이 ‘다시 한번 미래를 상상하고 희망하게 만드는’ 그 무엇이 작동하는 것 같다. ‘백신 박사’ 안철수의 삶은 전태일·이소선과 다르지만, “서로 존경하고 신뢰한다”는 ‘소셜 디자이너’ 박원순을 고리로 연결된다.
발터 베냐민이 그랬다. “우리에게 희망이 주어지는 것은 희망이 전혀 없었던 사람들에 의해서다”라고. ‘상상력이 바로 권력’이라던 68혁명의 정신을 체현하고 있는 ‘박원순·안철수들’이 열어갈 새 시대, 새 정치의 뿌리에는 ‘전태일·이소선들’의 피와 땀이 깃들어 있을 터다. 모든 것은 그 사람에게서 시작됐다.
한겨레21 편집장 이제훈 nomad@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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