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게 다 문재인 때문이지.” 연신 무릎을 주무르며 한 여자 노인이 말했다. 동행자는 맞장구치며 말끝마다 “주여~”를 덧붙였다. 내용인즉슨 지난겨울까지 그 무릎을 무릅쓰고 집회에 다니느라 무릎이 더 안 좋아졌고, 문재인이 중국 사람 들어오게 하는 바람에 코로나19가 번져 복지관이며 회관이며 다 문을 닫아 사람 만나기도 어려워졌다는 것이다. 옆자리 남자 노인은 돋보기 끼고 유튜브를 보는데 한 채널에 고정 못하고 이리저리 넘겼다. 볼륨은 그리 높지 않았으나(그 노인은 소리가 켜진 줄 몰랐을지도) 현장음과 진행자의 호들갑이 엉키는데다 그런 채널을 여럿 넘나들기까지 하니 도저히 근처에 있을 수가 없었다. 사람이 적지 않은 지하철에서 유난히 그 구역만 텅 비어 있던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여자 노인은 마스크를 턱에 걸치고 있었고 옆의 분은 코를 내놓고 있었다. 남자 노인은 한쪽 귀에만 걸어 늘어뜨리고 있었다. 침방울과 소음이 난무하는 공간은 그들만의 해방구 같았다. 광복절 전후 수도권 코로나19 재확산이 시작되기 전 어느 날이었다.
그즈음 시사주간지 <시사IN>에 실린 ‘박원순을 보내는 어떤 방법’ 기사에 화가 난 이들이 정기구독을 끊겠다고 했다는 얘기를 복수의 <시사IN> 관계자에게 들었다. 애도가 아직 끝나지 않았는데 또 허물을 들추었다는 게 이유 같았다. 기사는 박원순 전 서울시장과 28년간 여성운동 동지였던 정춘숙 더불어민주당 의원의 인터뷰를 바탕으로 구성됐다. 1992년부터 한국여성의전화에서 활동하며 평생 피해자 옆에 서온 정 의원 자신도 이렇게 혼란스럽고 흔들리는데 다른 이들은 어떨까 싶다며, 오랜 번민 끝에 떠올린 한 문장을 아울러 소개한 기사였다. 그 문장은 이렇다. “박원순을 빼고 봐야 보인다.” 이 기사에 왜 화를 내는지 이해도 가지 않지만 비판과 문제제기, 토론의 과정을 생략한 채 대뜸 구독부터 끊겠다며 굳이 댓글과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 알리고 나아가 <시사IN>에 근무하는 지인에게 통고까지 하다니, 같은 독자로서 당황스러웠다.
내가 이렇게 화났으니 알아달라는 것일까, 잘못을 빌라는 것일까. “다 문재인 때문”이라는 지하철 노인들과 “박원순의 업적을 짓밟는다”는 일부 86세대(1960년대에 태어나 80년대 대학에 다니며 학생운동 등에 앞장섰던 세대) 독자에게서 같은 모습이 겹쳐 보인다. 물론 그 세대 모두의 정서는 아닐 테고 다소 성급하게 나온 거친 표현임을 고려해도 묘하게 닮은 면이 있다. 언행에 ‘원념’이 깊게 배어 있다. 그리고 언제나 ‘적’이 있다.
태극기 노인들의 적은 우리가 익히 알고 있다. 친북좌빨이 모든 문제의 원인이자 적이다. 집회 현장이든 댓글에서든 그것은 어느덧 논쟁이 불가한 ‘믿음의 영역’이 되었다. 그 믿음이 ‘하나님과 친구 먹는’ 목사와 만나 어떤 위험천만한 결과를 낳는지 사회적 거리 두기 2.5단계 속에 매일 확인하고 있다.
문제는 86세대에게 등장한 ‘적들’이다. 불편하다, 싫다 진작 말하지 않다가 뒤늦게 문제를 제기한 ‘피해자스럽지’ 않은 비서들, 그들 편에 서서 앞날이 창창한 사람 감옥에 가두고 세상마저 등지게 하고도 계속 욕을 보이는 이들, 원피스 입고 국회 본회의장에 출석한 머리에 피도 안 마른 ‘어린 여자애’, 힘들게 이룩한 민주화와 인권 향상의 덕을 보면서도 감사할 줄 모르고 징징대는 역사의식도 정치의식도 없는 이기적인 ‘요즘 것들’이다. 이런 이들을 옹호하며 전선을 흐리고 적폐 청산에 애쓰는 정권을 도울 생각은 안 하는 진보 언론과, 악의적 언론의 프레임에 놀아난 생각 없는 대중은 가장 쉽고 만만한 적이다. 적대감은 종종 혐오감으로 바뀐다. “한겨레는 돈 없는 조·중·동”이라는 비아냥도 그것이다.
성마르게 남발하는 ‘아웃’(추방)과 ‘캔슬’(취소) 딱지는 경고를 넘어 길을 잃게 한다. 정권이든 언론이든 다음 세대를 향해서든 상대를 적으로 돌려야 나의 생각과 옳음이 증명되는 ‘적대적 공존’은 그만했으면 좋겠다. 지금 우리에게 마스크 못지않게 필요한 건 침묵이다.
김소희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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