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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만 대한민국!

광복 70년
등록 2015-08-18 18:13 수정 2020-05-03 04:28
컴퓨터그래픽 김민하

컴퓨터그래픽 김민하

2005년, 광복 60주년 당시 MBC가 준비한 특집 기획의 슬로건은 ‘함께 만드는 평화’였다. 한·중·일 3국이 지형적 관계 속에서 어떻게 과거에 맞섰고, 무엇을 현재 마주 놓고 있으며, 그래서 어디로 갈 것인가를 응시한 기획이었다. 10년이 흘러 KBS는 광복 70주년 기획으로 ‘나는 대한민국’을 제목으로 한 특집 기획을 준비했다. 그사이 무슨 변화가 있었던 것일까. 동북아 3국의 역사에서 평화를 응시하던 시선이 나에 대한 자부심으로 쪼그라든 상황이야말로 지난 10년간 우리가 지나온 역사의 단서는 아닐까.

떠들썩했다. 대통령은 부랴부랴 ‘임시공휴일’을 지정했다. 역사의 의미를 기념하고 경제를 살리는 행위가 동시에 수행될 수 있단 발상을 불과 열흘 전에 해내는 것이야말로 ‘창조경제’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비교적 큰 회사들도 노동자 3명 중 1명이 출근하고 그나마 자영업자와 중소기업 종사자에겐 해당 사항이 없었지만, 그런 것에 아랑곳할 일이었다면 ‘임시’라는 접두사를 붙이지도 않았을 것이다. 놀기만 하면 경제 효과가 수조원 발생한다는데 아니 놀 이유가 없는 결정이 아닐 수 없었다.

대통령은 ‘놀라’고 했지만, 한반도를 둘러싼 외교적 지형은 극악하다 할 정도로 위태롭다. 북한은 48년여 만에 지뢰를 매설했고, 그 지뢰가 북한제일 수 있단 것이 이미 공유된 상황에서 대통령은 ‘평화통일’ 메시지를 날리고, 통일부는 ‘대화 제의’를 해댔다. 청와대 국가안전보장회의(NSC)는 이번에도 작동이 더뎠고, 합찹의장은 북한 소행일 수 있단 보고를 받고도 약속된 폭탄주 회동을 취소하지 않았다. 청와대에 찍혀 물러난 여당의 전직 원내대표는 ‘다들 제정신이냐’고 물었지만 국방부 장관은 확실해질 때까지 기다린 것일 뿐이라고 맞섰다. 그 원내대표가 물러나고 나서 정부의 대북 기조가 북한의 소행에 진중함을 갖는 것으로 바뀐 게 틀림없어 보인다.

아베 신조의 담화 역시 속수무책이다. 오랜만에 일본 시민사회가 깨어나 국가를 향한 직접적 웅변을 했고, 일본의 전직 총리들마저 아베 총리에게 브레이크를 걸기 위해 나섰지만 유독 우리 정부는 정중동의 그것을 견지했다. 왜일까. 제 국민이 온몸에 불을 붙여 일본에 항의하는 상황에서조차 정부는 끝내, 끝끝내 어떤 외교적 수단과 방법을 최대한 자제하는 모습을 보였다. 박근혜 대통령은 북한의 지뢰 도발 이후 일성으로 ‘억지력’을 말했는데, 정작 억지력은 대일 정책에서만 효과적으로 작동하고 있다.

중국이 위안화로 세계경제를 흔들고, 미국은 정상회담으로 한국 정부를 견인하는 건 그나마 논외로 치자. 정부는 위안화 문제에서도 ‘긍정’을 말하고, 미국과도 그저 다 잘될 거라고 ‘긍정’의 복음을 전파할 뿐이니까. 행복해서 웃는 게 아니라 웃으니까 행복한 거라는 그 유명한 농담도 있지 않았던가. 광복해서 좋은 게 아니라 다 좋은 게 좋은 거니까 광복절에 쉬는 것인데 무슨 다른 말을 더 할 필요가 있겠는가.

광복, 70주년 무거운 숫자였다. 그리고 숫자가 중요한 무거움은 아니다. 지난 70년간 한국 사회가 맞이한 변혁은 실로 창대한 것이었다. 하지만 그 창대함을 정부는 가장 협량한 방식으로 박제화했다. ‘위대한 대한민국’과 동행하겠다던 재벌들의 현수막은 창연했지만, 그 선전과 선동의 얕은 수 속에서 ‘너는 대한민국’이란 호명에 ‘1도’ 동의하기 어려운 국민이 늘어만 가고 있다. 어찌됐건 호들갑 속에 기념일은 지나갔다. 이제 무엇에 대한 기념 요구로 정국을 끌어갈 것인가. 호명을 통해 국민을 훈육하려는 국가의 퇴행이 거센 때, ‘함께’가 ‘나’가 되고, ‘평화’가 ‘대한민국’으로 대체된 현실이 그저 싱숭생숭하다.

김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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