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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헌군주제라면 차라리 나았을걸

등록 2015-06-23 16:03 수정 2020-05-03 04:28
컴퓨터그래픽 김민하

컴퓨터그래픽 김민하

반다이남코 엔터테인먼트가 출시를 준비 중인 ‘섬머 레슨’이란 프로그램이 있다. 가상현실 속 캐릭터와 상호작용하는 소프트웨어로, 소니의 헤드마운트디스플레이 기기를 통해 구현된다. 지난해 8월 공개된 첫 번째 버전은 여고생 캐릭터와 한방에서 과외수업을 진행하는 내용이었다. 최근 두 번째 데모 영상도 공개됐다. (아마도 남성이 대부분일) 소비자의 반응은 제법 뜨겁다. 가상현실을 구현하는 하드웨어와 소프트웨어는 앞으로 더 많이 쏟아져나올 것이다.

요즘 박근혜 대통령의 행동과 발언을 볼 때마다 ‘섬머 레슨’을 떠올리게 된다. 박진감은 있는데 이상하게 리얼리티가 부족하다. 예를 들어 다음과 같은 말씀. “메르스는 중동식 독감으로 평소 음식을 골고루 먹고 운동도 열심히 하고 생활 주변도 깨끗이 관리하는 좋은 습관을 몸에 붙이면 얼씬도 할 수 없다.” 자체로 틀린 말은 아니다. 음식을 골고루 먹고, 운동하고, 위생적으로 생활하면 면역계 질환의 위험을 낮출 수 있는 게 사실이니까. 그런데 지금 중동호흡기증후군(메르스) 때문에 사람들이 계속 죽어가고 나라 전체가 발칵 뒤집힌 상황에서, 그것도 정부의 초동 대처가 실패해서 그렇게 된 상황에서 저게 정권 수장으로서 할 수 있는 말인가.

대통령께서는 6월17일 오후에는 삼성서울병원 원장을 전격 호출하셨다고 한다. 기사를 그대로 옮겨보자. ‘“전부 좀 투명하게 공개됐으면 하고” “더 확실하게 방역이 되도록 해주시기 바란다” “적극적으로 좀더 협조해 힘써주시기 바란다” “메르스 종식으로 들어가도록 책임지고 해주시기를 바란다”며 질책하듯 발언을 이어갔다.’

늘 이런 식이다. 국가적 중대 사안에서 최종 책임을 져야 할 대통령이, 항상 그 일에서 거리를 두고 멀찌감치 떨어져 있다. 비상 상황에서 리더가 해야 할 가장 중요한 일은 인력을 충원하고, 책임자를 임명하고, 권한을 일시적으로 집중시키는 것이다. 박근혜 대통령이 해야 했던 것, 그리고 국민이 기대했던 일은 바로 그런 일이었다. 물론 박 대통령이 사태를 외면하고 모르는 척하는 건 아니다. 인지하고 있고 분명 어떤 지시를 내리고는 있다. 그러나 대통령 본인이 당사자라는 감각은 완전히 제거되어 있다. 그저 ‘질타하고’ ‘꾸짖고’ ‘역정을 내는’ 것이 대통령의 유일한 역할인 양 그 역할을 열심히 수행한다(role-playing).

박근혜 대통령이 하고 있는 일은 통치가 아니라 ‘통치의 포즈’다. 요컨대 ‘유사 통치행위’다. 박근혜 대통령은 “군림하되 통치하지 않는” 입헌군주이셨던 걸까? 입헌군주제였다면 차라리 나았을 것이다. 통치 기능을 수행할 총리라도 뽑았을 테니. 지금 우리가 처한 상황이 최악인 이유는 대통령이 유사 통치행위를 하고 있는데 실제 통치하고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는 점이다. 메르스보다 전율스러운 공포는 바로 이것이다. 질타하되 개입하지 않는 대통령.

보수의 미덕은 세련된 이념 같은 것이 아니라 현실에 밀착한 태도 혹은 성향이다. 보수주의에 관한 빛나는 명언을 많이 남긴 정치이론가 마이클 오크쇼트는 거의 고전이 된 그의 에세이 ‘보수주의자에 관하여’(1956)에서 “나의 테마는 신념 혹은 정책이 아닌 기질”이라고 말한 바 있다. 그는 보수주의자를 이렇게 정의한다. “보수주의자가 되는 것은 미지의 것보다는 친숙한 것을, 시도되지 않은 것보다는 시도된 것을, 신비로운 것보다는 사실을, 가능성보다는 현실을, 무한한 것보다는 제한된 것을, 멀리 있는 것보다는 가까이 있는 것을, 남아도는 것보다 충분한 것을, 완벽한 것보다는 간편한 것을, 유토피아적 축복보다는 현재의 웃음을 선호한다는 것이다.”

박근혜 대통령이 지금까지 보여준 모습, “정말 간절하게 원하면 전 우주가 나서서 다 같이 도와준다”는 발언 등을 보면 이분은 통치자가 아니라 유사 통치행위를 수행하는 롤플레이어이고, 보수주의자라기보다 신비주의자다. 그러나 그저 비웃고 조롱하는 것만으론 부족하다. 어쨌든 우린 대통령의 남은 임기 동안 대한민국에서 살아가야 한다. 이 유례없이 현실초월적인 대통령을 조금이나마 지면에 끌어내리기 위해서라도 진지한 비판을 멈춰선 안 된다.

박권일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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