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완구의 사임이 기정사실이 되자 인터넷에서 작은 축제가 벌어졌다. ‘불멸의 총리 정홍원’ 패러디가 다시 등장한 것이다. ‘국무총리의 시간’ ‘총리의 블랙홀’ ‘뫼비우스 총리’ ‘총리하실래요?’… 그만두고 싶어도 그만둘 수 없었던 정홍원 총리를 묘사한 ‘짤방’들의 제목이다. 지난 1년간 너무 자주 봐서 이젠 이웃집 할아버지처럼 푸근하다. 네티즌에게 이 정도로 큰 사랑을 받았던 전직 총리는 처음인 것 같다.
왜 정홍원이었을까. 먼저 개인의 캐릭터를 꼽을 수 있겠다. 매력 터지는 정치인은 아니다. 그렇다고 스캔들로 얼룩진 인물도 아니다. 한마디로 무색무취, 물에 물 탄 듯 묻어가는 타입이다. 정홍원 총리의 ‘한없이 투명에 가까운 존재감’은 그러나 요즘처럼 ‘독한’ 캐릭터가 많은 시대에 역설적인 매력으로 다가올 수 있다.
세월호 참사 이후 정홍원씨가 총리직에서 물러나겠다고 했을 때만 해도, 자신을 포함해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다. 그토록 오래 자리에 머물러야 할 줄은. 그러나 정권이 ‘회심의 카드’로 꺼내든 후보들이 줄줄이 낙마한다. 부동산 투기, 탈세 의혹, 전관예우 논란, 막말 전력, 역사관 등 이유도 다채로웠다. 털어도 털어도 끝이 없는 총리 후보들 속에서, 정홍원은 웃는 듯 우는 듯 애매한 특유의 표정으로 총리 공관을 지켰다. 이른바 ‘파워엘리트’라 불리는 총리 후보들의 민망한 과거가 속속 드러날수록 정홍원의 무색무취함은 점점 더 큰 미덕으로 다가왔다. 그러다 문창극씨가 여론의 사퇴 압력 속에서도 무려 2주 동안 버티다 후보에서 물러나자 정홍원 패러디가 대폭발했다.
그의 인기는 단지 캐릭터나 대조 효과 때문만은 아니다. 근원적 이유는 따로 있다. 박근혜 대통령이다. 정홍원 총리는 박근혜 대통령의 ‘대리보충적 존재’였기에 인기를 얻은 것이다. 대리보충(supplement)이란, 철학자 데리다가 루소의 아이디어를 빌려 만들어낸 개념으로, ‘원래의 것을 대신해서 보충하는 것’을 말한다. 대리보충은 본래, ‘말’에 대비된 ‘문자’, ‘남자’에 대비된 ‘여자’, ‘자연’에 대비된 ‘문명’처럼 원래의 것을 보충하다가 원본의 순수성이 훼손된 본말 전도를 비판하기 위해 루소가 만들어낸 개념이다. 그러나 데리다는 순수한 원본이란 환상이며 대리보충의 원리가 더 현실적이고 핵심적이라 말한다. 음성언어에 대한 문자언어(에크리튀르)의 우위를 주장한 것은 그 연장선이다.
그럼 정홍원은 어떻게 박근혜의 대리보충적 존재가 되었을까. 박근혜 대통령이 세월호 참사 이후 보여준 태도는 실망을 넘어 절망스러웠다. 큰 재난이나 사고가 발생했을 때, 공동체의 리더라면 응당 해야 할 일이 있다. 억울하게 죽어간 사람들과 유가족, 그리고 비극을 지켜본 국민의 마음을 다독이고 한데 모으는 데 전력하는 것이다. 박근혜 대통령은 그러지 않았다. 시간이 지날수록 ‘더 격렬하게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반면 정홍원 총리는 달랐다. 욕설과 수모를 감내하며 사고 현장인 팽목항을 찾았다. 대통령의 지시이건 본인의 판단이건 동기는 아무래도 좋다. 정홍원 총리는 그렇게 박근혜 대통령의 어떤 ‘결여’를 메우는 존재가 되었던 거다. 그때 국무총리는 대통령의 실무적 대리자가 아니라 상징적 대리자가 된 것이며, 일시적이나마 국민이 대통령에게 기대했던 총체적 리더십을 구현한 것이다.
헌법에 명시된 국민주권은 당위다. 그러나 그 당위는 추상화되어 국민 개개인이 실감하기 어렵다. 한편 대통령은 현실의 직접적이고 강력한 작동 기제라는 점에서, 국민의 대리보충적 존재라 할 수 있다. 그런데 대통령이라는 대리보충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다면, 혹은 작동하지 않는다고 의심받는다면 어찌될까. 그때 ‘대리보충의 대리보충’이 등장하게 된다. 정홍원 총리는 바로 그 순간에 우연히 그 자리에 있었다. 그리고 ‘불멸의 총리’가 되었다.
박권일 칼럼니스트한겨레21 인기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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