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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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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소지향’의 시대

등록 2014-04-19 15:17 수정 2020-05-03 04: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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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호 특집 기사의 한 꼭지로 소개하는 ‘한 대학생의 다단계 연애 사전’ 글을 읽고 있노라니, 솔직히 낯선 단어가 참 많다. 내심 ‘최신 용어’에 그다지 문외한은 아니었노라 자부한 게 큰 착각이었던 모양이다. 굳이 대학생들의 ‘연애 사전’을 펼치지 않더라도, 요즘 TV에선 유독 연애나 사랑과 관련한 미묘한 감정을 다루는 프로그램이 차고도 넘친다. 40여 년 전 서구 젊은이들 입에서 흘러나왔던 (All You Need Is Love)이란 노랫가락이 뒤늦게 우리 사회의 시대정신 자리라도 꿰찼단 얘긴가?
흔히 대중문화를 ‘시대의 거울’이라 부르곤 한다. 변화무쌍한 대중문화의 트렌드에는 특정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이 일상생활에서 말하고 생각하고 행동하고 느끼는 복잡미묘한 감정의 결이 고스란히 녹아들어 있기 마련이리라. 대표적인 개그 프로그램으로 꼽히는 만 놓고 봐도 앞서 말한 흐름은 뚜렷하다. 한때 시사 프로그램에 가깝다는 평가를 들을 만큼 시사 관련 풍자 내용이 주를 이뤘으나, 요즘엔 연애나 다양한 인간관계 등을 소재로 꾸민 꼭지가 수두룩하다. 특히 눈에 띄는 대목은, 다양한 색깔의 감정이 녹아든 인간관계를 풍자적으로 다루더라도 ‘안 생겨요’ ‘안 맞아’ ‘앙대요’ 등 유독 부정적인 뉘앙스를 지닌 표현이 넘쳐난다는 점이다. 언젠가부터 긍정보다는 부정이, 진취적 확장보다는 폐쇄적 축소 또는 유지가, 자기 확신보다는 유예와 자기 억압을 통한 정체성 확인이 지배하는 사회 분위기가 형성됐음을 뜻하는 걸까?(물론 지나친 비약이길 내심 바란다.)
어찌 보면, ‘축소지향’은 나름 이 시대의 올바른 해법인지도 모른다. 지난날 사회의 모든 분야에서 일방적 확장과 과도한 팽창을 밀어붙였던 게 레버리징의 논리였다면, 이제는 그 과정에서 불어난 거품을 걷어내는 디레버리징이 필요한 까닭이다. 디레버리징이야말로 우리 시대의 새로운 규범, 곧 ‘뉴노멀’임을 일깨우는 목소리도 많다.
다만, 이런 가르침을 2014년 봄 우리 사회에 오롯이 ‘대입’할 수 없는 건 우리만의 아픈 경험을 빼놓을 수 없기 때문일 게다. 우리에겐 불과 1년 남짓한 사이 국가기관이 대선 개입을 통해 헌정 질서를 무참히 유린하고, 그 증거들을 교묘히 삭제하며, 공안몰이에 나서기 위해 뻔뻔한 증거 조작마저 서슴지 않는 걸 지켜봐야 했던 트라우마가 남아 있다. 연애도, 사랑도, 달콤하고 아름답다. 어느새 연애와 사랑의 언어에까지 스며든 자학과 부정, 유예와 폐쇄의 쓰라린 감성이 양극화로 활력 잃은 우리 경제와 구닥다리 공안통치에 지쳐 자기 억압과 자기 검열을 깊숙이 내면화하는 우리 사회의 자화상으로까지 한걸음에 내달리지나 말았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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