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세기 말에 활동한 이탈리아 생리학자 안젤로 모소는 인간이 느끼는 불안감이 호흡이나 혈압 등 신체 활동에 미치는 영향을 측정하는 기계장치를 개발해 오늘날 우리에게 익숙한 ‘거짓말탐지기’의 초기 형태 탄생에 공을 세운 인물로 알려졌다. 1875년의 일이다. 하지만 그가 세상에 남긴 ‘화제작’은 따로 있다. 마치 자그마한 나무 탁자 위에 장갑을 가지런히 얹어놓은 듯한 모양의 기계장치를 머릿속에 떠올려보자. 기계장치 한쪽에 설치된 금속 장갑에 손가락을 끼워넣으면 반대편 아래쪽에 매달린 금속 추가 장갑에 연결된 줄을 잡아당겨 팔근육의 수축과 이완 정도를 잰다. 모소는 1884년 선보인 이 기계장치에 ‘에르고그래프’란 이름을 붙였다. 신체에 가해지는 압력과 피로도의 관계를 나타내는 그래프에서 유래한 말이기도 하다. 에르고그래프는 바로 인류 최초의 ‘피로측정기’다.
왜 지금부터 100년도 훨씬 전에 사람들은 몸으로 느끼는 피로의 ‘크기’를 정확히 재려는 뜻을 품었을까? 그 답은 산업화 초기의 열악한 작업장 환경과 그로 인한 첨예한 사회갈등에서 찾을 수 있다. 19세기 중반 주요 서구 나라들은 본격적으로 산업화 단계에 접어들면서 이전 시기엔 경험하지 못한 여러 사회문제와 맞닥뜨려야 했다. 대규모 노동력이 투입된 작업장에선 산업재해가 끊이지 않았고, 열악한 보건 환경과 영양 부족으로 인한 각종 질병도 사람들을 괴롭혔다. 무엇보다 강도 높은 노동에 따른 육체의 피폐화는 당장 산업화 자체의 진전을 가로막는 장애물이자 사회계층 간 갈등을 증폭시키는 기폭제로 등장할 태세였다. ‘과학적 조사·연구’가 이뤄져야 제도 개선 등 후속 대책도 마련할 수 있는 법. 21세기 사람들 눈에는 너무도 엉성해 보이는 이 피로측정기도 이런 배경에서 탄생했다. 19세기 후반께 사회보험 등 사회복지 정책의 기본 얼개가 대충 갖춰진 것도, 모두 이런 선행 작업의 산물이다.
당시 신생 학문인 생리학이 주인공 역할을 맡았다는 점도 흥미롭다. 본격적인 산업화 이전 단계까지만 해도, 인간이 느끼는 피로란 게으름이나 나태 등 주로 인간 자신의 정신적·의식적 미성숙이나 태도 불량의 탓으로 치부됐다. 인간의 맨몸뚱이 자체를 연구 대상으로 삼은 생리학은 이런 흐름을 일거에 뒤집어버렸다.
하지만 이 시기의 수많은 자연과학적 선행 연구와 그에 힘입은 ‘사회개혁’ 흐름엔 또 다른 얼굴이 감춰져 있었다. 인간의 숭고한 정신이나 태도, 의지 등 주관적 영역에 머물러 있던 관심 대상을 옮겨오긴 했으나, 정작 잉여생산물의 분배 등을 둘러싼 거시적 사회구조에는 눈감은 채 인간 육체(노동력) 그 자체라는 극히 미시적 대상에만 시야를 붙들어둠으로써, 오히려 근본적인 사회변화 동력을 차단해버리는 효과를 낳았기 때문이다. ‘노동하는 인간’(정신)에서 ‘노동하는 육체’(몸뚱이)로의 프레임 변화는, 주된 갈등선을 인간 육체가 견딜 수 있는 물리적 한계라는, 극히 ‘중립적’인 문제로 축소해버린 셈이다. 당시 번성했던 ‘개혁지향적’ 사회과학의 민낯이기도 하다. 인류 역사는 이같은 ‘몸뚱이 담론’의 극대화가 결국 생학이라는 퇴행적 변종과, 그를 먹고 자란 파시즘이란 괴물로 이어졌음을 똑똑히 기록하고 있다.
우리의 소중한 육체를 단지 생존경쟁의 마지막 무기이자 보루인 양 한없이 밀쳐만 대는 이 땅의 촌스러운 ‘육체’ 숭배주의. 제철 만난 듯 더욱 설쳐대는 질기디질긴 군사문화의 잔재를 거름 삼아 쑥쑥 자라나는 그 괴물은 과연 어디로 향하고 있는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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